진산파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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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건
1971년 신민당 당수 유진산의 국회의원 출마 등록을 둘러싸고, 신민당 내에서 벌어진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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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71년 신민당 당수 유진산의 국회의원 출마 등록을 둘러싸고, 신민당 내에서 벌어진 갈등.
내용

신민당 당수 유진산 1971년 5·25 국회의원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인 5월 6일에 마감시간 3분 전에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기호 1번 후보로 등록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신민당 내부에서는 이것에 반발하는 신민당 내분 사태이다. 저녁 7시에 자택으로 돌아온 유진산을 향해 당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당원들은 ‘정계은퇴, 당수직 사퇴, 전국구 후보 사퇴’ 중 한 가지를 선택하겠다는 유진산의 약속에 따라 해산하였다. 그러나 유진산은 5월 6일 일본으로 출국하고 당권을 둘러싸고 신민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이에 대해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신민당 6인수권위원회(김쟁중, 유진산,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한 뒤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하였고, 김영삼·이철승·이중재·김재광·김형일 등은 김대중의 당권 장악을 저지키로 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길 것에 합의하였다.

이렇듯 신민당의 주류와 비주류의 내분이 격화되는 가운데 5월 7일 일본에서 귀국한 유진산은 5월 8일 고흥문·양일동 부의장 등과 함께 당직에서 사퇴하며 김홍일 전당대회체제를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기자회견에서 “당수가 의혹에 찬 지역구 포기로 당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그것이 당내 파쟁의 소산인양 돌리려함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비판하였다.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신민당 주류측은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고흥문·홍익표의 사퇴,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의 당수권한대행’ 등을 제시하고 이 제안을 비주류와 김대중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유진산 당수와 양일동·고흥문·홍익표 부의장들이 사퇴하고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선에서 진산파동은 일단락되었다.

김홍일은 5월 11일 총선기간 동안 모든 당무와 선거대책을 수립할 7인선거대책위원회 위원으로 김홍일, 김대중, 윤제술, 김형일, 김재광, 이충환, 윤길중 등을 임명하였고, 신민당은 선거운동에 돌입하였다.

참고문헌

『야당30년 도전과 좌절의 발자취』(이영석, 인간사, 1981)
『동아일보』(1971.5.6∼5.11)
집필자
노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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