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 5일 이른바 ‘시공관사건(市公館事件)’으로 명목상 해산한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의 후신으로, 서울 소공동에 있던 옛 유도강무관(柔道講武館)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3000만의 전투 전위부대임을 자임하고, 강령으로 ① 신명을 바쳐 완전한 자주독립을 전취(戰取)할 것, ② 만인공생(萬人共生)의 사회건설에 방해되는 악질적 요소에 대하여 결사적 투쟁을 전개할 것, ③ 국가의 지상명령에 절대복종할 것, ④ 민족적 명예를 천하에 선양할 것을 내세웠다.
책임부서의 임원으로는 회장 유진산(柳珍山), 사무국장 김헌(金憲), 총무부장 김원옥(金原玉), 조직부장 박용직(朴容直), 선전부장 진시헌(陳時憲), 재정부장 신흥국(申興國), 외사부장(外事部長) 오찬관(吳贊瓘), 외사2부장 강덕상(姜德祥), 문화부장 양상근(楊常槿), 조사부장 정현석(鄭鉉錫), 감찰부장 김응천(金應天)을 선출하였다.
이 단체는 결성 이후 대한민주청년총연맹의 운동노선과 거의 같이 반공투쟁 일선에서 많은 투쟁을 벌이다가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의 통합문제로 통합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진통을 겪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지청천(池靑天)이 1947년 4월 31일 귀국한 뒤 곧 당시의 기존 우익진영의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 대동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의도로 대동청년단의 결성준비에 착수하자, 많은 청년단체들이 통합문제로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빚었다.
청년조선총동맹 역시 유진산의 신중론과 통합찬성론으로 갈라져 극도의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두 번에 걸친 중앙위원회 회의결과 공식적으로는 통합안이 부결되었지만 많은 간부들과 단원들이 9월 21일 결성된 대동청년단에 참가함으로써 청년조선총동맹은 간판만 유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