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운경(雲耕). 경기도 시흥 출생.
1938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곧 일본의 조선농민의 경제적 약탈기관이었던 금융조합 이사와 금융조합연합회 사업부장·고문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자 경기도 시흥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며, 대한민국의 헌법제정에 참여하는 등 정치활동을 보여주었다.
이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시흥에서 당선되었고, 1951년 국회 재경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6·25전쟁 중인 1952년과 1953년 사이에는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당시 자유당의 다양한 계파 중에서도 이전의 이범석(李範奭)계의 족청파(族靑派)로 지목받았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국회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년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상태에 있었는데, 이는 당시 정치의 심한 혼란과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시 정계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79년 10·26사태 이후 전두환(全斗煥)군부세력의 권유로 19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고부터였다.
처음에는 이승만(李承晩)의 행정부에서 일하였고 자유당에 소속되었다가 뒤에는 다시 야당에서 활동하였으나, 그가 생각하였던 정치적 주장을 펼 수 없기 때문에 1980년대부터는 여당에 몸을 담게 되었다.
1981년 집권여당인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981년에서 1983년까지 대표위원을 지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외교정상화에 노력하였는데, 그러한 시도의 하나로 한일친선협회의 회장이 되었고, 일본정부로부터 한일수교에 대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1983년 이후 민정당 상임고문이 되었고, 1985년 민정당 전당대회의장이 되었으며,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국회의장을 지냈다. 당시 집권여당의 노정객으로 군부출신의 젊은 미경험 정치인들을 견제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가 내세운 정치적 논리는 정계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1988년 노태우(盧泰愚)정부 등장 이후부터는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특히 3당합당 이후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