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하사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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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레닌의 적군(赤軍)과 교전한 사건.
이칭
이칭
자유시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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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흑하사변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레닌의 적군(赤軍)과 교전한 사건이다. 자유시사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삼둔자전투·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둔 독립군은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자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은 대군단을 결성하고 군비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한편 일본은 연해주의 한인혁명단체를 거론하며 소련과 체결한 어업조약을 취소하였다. 소련은 일본의 편을 들어 독립군의 무조건적인 무장해제를 통지하였다. 독립군은 완강히 저항하였고, 소련은 장갑차와 기관총을 앞세워 공격하였다.

목차
정의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레닌의 적군(赤軍)과 교전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20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일본측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펴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해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은 약 3,500명 정도였으며, 총재인 서일(徐一)을 비롯해 독립군의 중진들이 총망라되었다.

그러나 이 곳에 집결한 독립군은 좀더 활동하기에 유리하고 일본군의 위협이 적은 곳을 찾아 국경을 넘어 연해주의 이만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전부터 연해주에 거류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문창범(文昌範) · 한창해(韓滄海)와 자유대대(自由大隊)의 오하묵(吳夏默) · 박승길(朴承吉) 등은 연해주로 들어온 독립군이 한 곳으로 집결할 수 있도록 그해 12월초에 하바로프스크의 적군 제2군단본부와 교섭하였다. 밀산에 집결하였던 독립군은 1921년 1월경부터 이만시로 집결하여 부대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 훈련을 지속하였다. 이리하여 국민의회는 자유시에 군대 주둔지를 마련하는 한편 독립군에 사람을 파견해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인도하였다.

1921년 3월 중순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 · 허재욱(許在旭)의 총군부(總軍府), 안무(安武) · 정일무(鄭一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 · 이청천(李靑天)의 독립군과 군정서(軍政署), 전부터 시베리아에서 무장활동을 해오던 김표돌 · 박공서(朴公瑞)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박그리고리의 독립군단, 임표(林彪) · 고명수(高明秀)의 이항군(尼港軍), 오하묵 · 최고려(崔高麗)의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등이었다.

수 개의 무장군이 자유시에 집결하여 대군단의 결성과 군비 확장의 기회가 왔으나 각기 사정이 다른 여러 부대의 집결은 자연 뜻하지 않은 분쟁을 가져왔다. 즉, 적군의 제2군단 제6연대장으로서 흑하지방 수비대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러시아에 귀화한 오하묵과, 이항군이라는 적계(赤系)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박일이야 사이에 군권장악을 위한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내용

1921년 1월 이용(李鏞) · 채영(蔡英) 등은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 소집위원회를 결성하고 당시 흑룡주(黑龍州) 일대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정부 군부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동정부 군부에서는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에, 그레골예프를 참모부장에 임명해 자유시로 파견하였다. 동시에 이항군의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라 개칭하고 독립군 및 자유대대 등 모든 무장단체는 사할린의용대의 관할 하에 둘 것을 명령하였다. 얼마 후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극동정부 군부는 그레골예프를 연대장으로, 박일이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그레골예프와 박일이야는 즉시 군대 관리에 착수하였다. 우선 부대 주둔지를 자유시 서북방에 위치한 마사노프로 정하고 각 부대를 이 곳에 이동시켰다.

한편, 전한의병대의회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가 재노령 무장부대를 관할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교섭해 재로한인무장군을 통괄할 수 있는 권한을 자기들에게 위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결과 탄생된 것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였다. 후에 정식 군정의회를 조직할 것을 전제로 우선 임시군정의회를 세웠다. 총사령관에 소련인 갈난다라시빌리, 부사령관에 오하묵, 임시참모부장에 유수연(兪洙淵), 위원에 김하석(金夏錫) · 채성룡(蔡成龍)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군정의회의 병력 강화를 위해 적군 5군단 내의 기병[코카서스 기병] 600명과 동군단 내에 소속된 합동민족군[한인부대] 600여 명을 부속시켰다.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이르쿠츠크 공산당 정치학교 제1회졸업생 16명을 대동하였다. 이들 군정의회 간부들은 1921년 4월 14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해 17일 치타에 도착하자, 극동공화국정부 군부총장에게 군정의회 성립 경과를 통고하고 각 무장단체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부총장은 적군 제2군단에 무장군의 인도를 명하고 치타에 있던 한인부(韓人部)를 해체하였다. 5월 2일 자유시에 도착한 군정의회는 무장군의 자유시 집결을 서둘렀으나 사할린의용대를 비롯한 마사노프에 주둔 중인 전한군사위원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을 군정의회는 이르쿠츠크 동양비서부에 보고했으나 당시 병력면의 열세에 처해 있던 군정의회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뒤 5월 28일 합동민족군 600명이 자유시에 도착하고 6월 2일에는 마사노프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군 440여 명이 자유시로 합류하였다. 6월 6일에는 총사령관 갈난다라시빌리와 의원 유동열(柳東說) · 최고려 일행이 코카서스기병 600여 명을 인솔하고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정세는 일변해 군정의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일본과 소련은 북경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때 일본 측은 소련영토 내에 일본에 유해한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면서 이의 취소를 주장하였다. 소련도 혁명 후 쇠약해진 국력으로 일본과 불화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해 독립군의 무장취소를 약속하였다. 결국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가 내려졌다.

완강히 반대하는 의용군에 대해 군정의회는 강제로 무장해제를 단행할 것을 결정하고, 6월 28일 2대의 장갑차와 30여 문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의용군을 공격하였다. 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달리 기록되어 있다. 『재로고려혁명군연혁(在露高麗革命軍沿革)』에는 의용군 측이 사망 36, 포로 864, 병자로 불참한 자 15, 박일이야가 전투 중 인솔하고 도망한 자 34, 행방불명 59명이며, 군정의회측은 사망 2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간도 방면 11개 단체 성토문에는 의용군 측 전사 72, 익사 37, 산중에서 힘이 다해 사망한 자 250여 명, 포로 917명, 군정의회 측은 적군 1명만이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7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78)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박영석, 일조각, 1982)
「자유시(自由市)참변에 대해」(신재홍, 『백산학보』 14,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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