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은(朴昌殷)의 생몰연도, 출생지 등 인적 사항에 관한 정보는 현재까지 거의 알 수 없다. 이명은 박이반이다.
1920년 4월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에 외교원 겸 러시아 비서로 참여하였다. 1920년 10월 치타에서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2월 2일에 러시아령 극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인 사회주의 단체 대표자회의에 아무르주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 각지의 한인공산당을 통합하고 활동을 조정할 기관으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를 조직하였고, 박창은은 박애(朴愛), 계봉우(桂奉瑀) 등과 함께 극동국 한인부의 집행부가 되었다.
1921년 초 자유시(自由市, 알렉세예브스크)에 한인 무장부대들이 집결하자 이들을 통합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한인 통합 부대를 결성하기 위해 ‘전한의병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극동국 한인부는 전한임시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사령관에 박창은을 임명하였다. 전한임시군사위원회는 전한의병대회를 개최하기 이전까지 모든 한인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다.
1921년 3월 중순 전한의병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통합 부대인 ‘대한의용군’이 결성되었다. 이 부대는 극동공화국 국방부 산하 사할린특립의용대로 편재되었다. 통합 부대를 창설한 후 박창은은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러시아인 그리고리예프는 박창은의 후임으로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에 선임하였다. 박창은은 나이가 많지 않아 일반 군인의 신뢰를 얻기 힘들었다고 하며, 박알리야와 갈등이 있었다고도 한다. 박창은은 이후 한인부를 탈퇴하고 대한국민의회 비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