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와 아무르주의 한인 빨치산부대,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있었던 서·북간도의 한인 독립군 부대들이 1921년 3월 자유시(스바보드니)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의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하는 사할린 의용대, 이르쿠츠크의 전로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는 대한국민의회의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했던 자유대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사할린의용대는 당시 치타주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와 협력하여 1921년 3월 15일 열린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에서 ‘전한군사위원회’와 산하의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했다.
1921년 4월경 아무르주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은 약 4,500명 규모였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병력이 같은 장소에 집결했는데, 이들 한인무장부대를 통일하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갖가지 난관이 존재했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무장부대들의 독자성이 매우 강했고, 통일된 규율을 갖고 있지 못했다. 개별 무장부대는 상이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또한 러시아와 만주의 광활한 지대에서 오랫동안 분산적으로 활동해왔다.
치타주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는 한인 군대통합에 적극적이었다. 자신의 지도 아래 한인 대부대를 창설하려고 했다. 이들은 ‘전한의병대회(全韓義兵代議會)’를 열어 최고군사위원회를 선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왜냐하면 개별 특성이 강한 무장부대를 통합하려면 그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한인무장부대를 일컬어 ‘의병’이라고 지칭하는 점이 이채롭다. 대한제국 멸망 전후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의병운동을 연상케 한다. 이 시기 무장투쟁 참가자들은 한말 무장투쟁 전통의 연장선에서 자신들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자유시에 주둔하게 된 한인 독립무장부대들은 자유대대와 사할린의용대로 크게 구분되었는데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의 정치적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하였고, 사할린의용대는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의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이르쿠츠크의 전로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제휴하고 있었고,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부장 슈미야츠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은 치타 소재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의 지휘 아래 있었고, 극동공화국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국민의회의 지도적 위치를 수용하지 않았다..
치타의 극동국 한인부와 사할린의용대의 주도로 1921년 3월 15일 연해주와 서북간도에서 이동해온 한인군대 대표자들이 참석한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가 주둔지인 마사노프에서 개최되어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했다. 전한군사위원회의 기원은 ‘전한의병대회’ 소집에서 기인했다. 당시 치타 한인부는 1920년 12월 21일 간부회의에서 소집대상을 “중국령과 러시아 극동에 소재하는 한인 빨치산부대들”로 정했다. 이들의 대표자들을 불러서 1921년 2월 10일 치타에서 ‘전한의병대회’를 소집한다는 것이었다.
대회가 소집되기까지 임시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모든 한인 군대를 통솔케 한다고 결정되었다. 한인부는 전한의병대회 소집을 앞당기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921년 1월 16일에는 의병대회 소집을 준비할 ‘전한의병대회 소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임시군사위원회를 선출했다. 이 위원회는 전한의병대회를 정식으로 개최하기 이전까지 모든 한인군대를 통솔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임시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된 이는 사령관 박창은, 부사령관 이용李鏞, 군정위원 한창걸韓昌傑, 편성부대 사령관 김민선, 사할린 대대 군정위원 박일리야 등이었다. 참모부장으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참모부가 추천한 러시아인 그리고리예프Григорьев가 임명되었고, 기술적 활동을 조정하기 위해 그 산하에 10명으로 구성하는 군사전문단이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박창은은 치타 한인부 위원이며, 이용과 채영은 상해 한인사회당의 지도자인 이동휘 주선으로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각각 동로東路, 연해주사령관, 북로北路, 북간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최니콜라이는 한인사회당 군사부와 긴밀한 연관을 가진 다반군대 사령관이었고, 채영과 한운룡도 한인사회당의 군사간부였다. 결국 전한임시군사위원회 간부진은 극동국 한인부와 상해 한인사회당, 상해임시정부의 군사간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창걸과 김경천은 연해주 수청에 근거를 둔 한인빨치산 지도자이었는데, 이들은 아무르주로 집결하는 대신 현지에서 빨치산운동을 지속했다.
한인의병대 사령부는 치타 한인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는데 상해정부 위임 군관과 상해공산당, 치타 한인부의 혼합체였다. 전한임시군사위원회의 지도 아래 통합된 한인 연합부대는 ‘대한의용군’ 또는 ‘사할린의용대Сахалинский Партизанский Отряд’로 불리었다. 한인통합부대는 극동공화국 국방부 산하 ‘사할린 특립 의용연대’로 편제되었던 것이다.
전한임시군사위원회는 한인 부대들의 주둔지를 변경시켰다. 일본군의 첩보망이 퍼져있을 가능성이 있는 철도 연선지대를 벗어나 좀더 깊숙한 오지로 한인 군대를 배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주둔지는 자유시 서북방 70베르스타약 75km 지점에 소재하는 마자노프Мазанов 마을이었다. 약 150~160호 규모의 러시아인 농민들이 거주하는 농촌지대였다. 그곳으로 한인부대들이 집결했다. 사할린대대와 다반군대를 비롯하여 북간도에서 도착한 한국인 독립군부대들도 속속 그곳으로 이동했다.
전한의병대회는 1921년 3월 중순 크라스노야로보(Красноярово) 마을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극동공화국 참모본부(командование ДВР)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Дальбюро ЦКРКП)의 승인 아래 열렸다. 전한의병대회에는 대한의용군에 망라된 각 한인군대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대회는 3일간 계속되었다. 이 대회에서 정식으로 한인통합군대의 최고지휘부가 선출되었다. 전한군사위원회와 대한의용군 총사령부가 조직된 것이다.
군사위원으로는 이용·채영·한운룡·장기영·박일리야 등 5명이 선임되었다. 대한의용군 사령부 간부로는 홍범도·안무·서일·조욱曺昱·이청천·이용·채영·최진동·오하묵 등 15명이 선출되었다. 군사위원에는 한인사회당계열의 군사간부들이 포진했고, 사령부 간부로는 각 단위부대 지휘관들이 배치되었다.
이에 맞서 1921년 3월 초 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지도하에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여 전체 한인의병대를 연합하도록 함으로써 전한군사위원회와 고려혁명군정의회라고 하는 두 개의 최고 한인군사조직이 출현하였다. 아울러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와 상해에서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 창립되어 상호대립이 격화되었다.
이후 양 세력은 전한군사위원회 관할의 사할린특립의용대는 병력이 총 1,770명이었고, 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국지도하의 제1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의 제1고려혁명군은 1,972명으로 재편되었는데, 1921년 6월28일-29일 대립하던 두 세력 가운데 고려혁명군정의회측이 맞서 사격하지 않기로 한 사할린특립의용대을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시도함으로서 자유시사변이 발생했다.
자유시사변시기에 사할린특립의용대에 속해 있었던 박 일리야 군대(사할린 의용대) 가운데 상당수는 자유시를 탈출하여 당시 이만전선에서 활동중이던 한인 빨치산부대 군비단에 합류하여 이후 대한의용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1921년 겨울부터 1922년봄까지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같이 전투에 참여했다.
자유시 주둔 한인 무장부대들은 아무르주 한인공산당의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하는 사할린 의용대, 이르쿠츠크의 전로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는 대한국민의회의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했던 자유대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치타주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와 사할린의용대의 주도로 1921년 3월 15일 열린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에서 ‘전한군사위원회’와 산하의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자신의 위상을 각 의병부대 대의원들의 손으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직된 최고군사기관이라고 자부했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이용을 대표로 선정하여 치타로 파견했다. 극동공화국과 러시아당 극동국에 전한군사위원회 결성사실을 알리고, 그들과 적절한 관계를 수립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에 맞서 같은 시기 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국의 지도하에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설립됨에 따라 자유시 주둔 한인 무장부대들에 대한 지휘권을 두고 두 개의 최고 한인군사조직이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20년 10월 러시아혁명세력은 치타를 수도로 하는 극동공화국을 설립하였는데, 우수리강을 기준으로 이만남부의 연해주를 백군 세력과 일본군이 점령하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극동공화국 내에 주둔한 각 의병대들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대에 정식군대로 편성되고 통일되어가던 시기였는데, 이만남부지역에서는 빨치산운동이 더욱 활성화되고 있었다.
당시 한인빨치산부대들의 아무르주 이동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아무르주는 연해주와 달리 백군 세력과 이를 후원하는 일본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러시아혁명세력 즉, 극동공화국의 관할로 이른바 ‘해방지구’였다는 점이다. 둘째 소비에트정부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특사 한형권 사이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중국령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아무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무장세력들을 통합한 단일지휘체계의 대규모 군단을 구성한다는 계획에 따라 이들 한인무장세력들이 아무르주로 집결하고 있었다.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로 집결한 한인무장부대의 통합 및 이에 대한 지휘권과 관련된 단일한 한인 무장세력 지도부의 설립에 대해 원만한 합의의 형태로 진행되지 못했다. 자유시가 위치한 치타 극동공화국 공산당 한인부의 주도로 진행된 ‘전한의병대회’ 사업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전한임시군사위원회가 주도하는 한인무장부대의 통일운동에 대해 모든 한인 군대가 지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치타 한인부 주도하에 한인 군대가 통일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소재하는 이르쿠츠크로 대표단을 파견했다. 극동국 한인부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힘은 이르쿠츠크에서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르쿠츠크에서 또 하나의 최고군사기관이 탄생했다.
마자노프에서 전한의병대회가 개최되고, ‘전한군사위원회’와 ‘대한의용군’이 정식으로 발족하던 바로 그 시기에 이르쿠츠크에서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주도 아래 ‘고려혁명군정의회’라는 이름의 최고군사기관이 조직되었다. 극동비서부는 최고기관 선임을 한인 군대의 자체 선출에 맡기고자 하지 않았다. 아래로부터 선출한다면 극동비서부가 바라지 않는 결과가 나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 3월 중순 극동비서부는 코민테른의 이름으로 직접 군사최고기관을 지명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전한공산당 창립대회가 소집중에 있음을 감안했다. 정식군정의회는 공산당 대회 후에 조직키로 하고,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지명하기로 했다.
1921년 3월 하순에 두 개의 한인 최고군사기관인 ‘전한군사위원회’와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설립되었고, 이 둘은 서로 자신이 유일한 최고군사기관이라고 주장했으며, 각기 휘하의 한인 군대를 ‘대한의용군’ 혹은 ‘고려혁명군’으로 통일하려고 경쟁했는데, 이는 결국 같은해 6월말 양 세력이 충돌하는 자유시사변의 직접적인 발생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