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혈전을 전개하다 동삼성(東三省)으로 건너가 각지로 흩어졌던 의병들이 국내의 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아 만든 단체가 의군부이다.
중심인물로는 이범윤(李範允) · 진학신(秦學新) · 최우익(崔友翼) · 김청봉(金淸鳳) · 김현규(金鉉圭) · 신립(申立) · 고평(高平) · 이을(李乙) · 김종헌(金鍾憲) 등을 들 수 있다.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그 밑에 조선의용군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주로 김청봉 · 허승완(許承完) 등이 조직해 독립전쟁을 진두 지휘했으며, 활동 작전지대를 화룡(和龍) · 왕청(汪淸) · 혼춘(琿春) 지역까지 확대 실시하였다. 재정 조달은 그곳에 거주한 한국 동포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했다. 1년 2개월 동안 군세가 확대되어 6개 대대의 큰 규모로 편성되었다.
중부의군부 참모장이며 조선의용군 총수인 고평은 일본에 대한 항쟁과 여러 반대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그 해 7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조선의용군은 일본 제기관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 용정(龍井) 국자가(局子街) 등지에 있는 일본인과 친일 주구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했다. 이후 고평은 완전한 독립군을 만들자며 전만주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에 통일과 단결을 호소했다.
1920년 8월 하순 고평은 감사대(敢死隊) 150명을 선발, 노야령(老爺嶺) 동북간에 매복시켰다. 그러나 중국군과 부닥쳐 불필요한 격전 끝에 양쪽 모두 손해를 입었다.
이 급보에 접한 의군부 본부에서는 총무부장 최우익에게 직접 의용군 3개 중대를 이끌고 중간촌(中間村)으로 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퇴각한 중국군 대신 들어온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격전 중 최고 전략가 최우익을 비롯해 이을 · 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이 희생되었다. 이를 계기로 의군부 본부와 소속 산하 의용군은 우선 내부를 정돈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북로군정서가 일본군과 청산리대첩을 겪고 밀산(密山)으로 퇴각했을 때는 행동을 같이했고, 이후 조선의용군도 흑룡강(黑龍江)을 넘어 노령(露領)으로 들어갔다. 1921년 6월 자유시(自由市)에서 러시아군병과 충돌하여 큰 타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