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재령군, 서쪽은 송화군, 남쪽은 벽성군, 북쪽은 은율군·안악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10′∼127°05′, 북위 38°12′∼38°31′에 위치하며, 면적 791.7㎢, 인구 13만 7442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14개 면 165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신천읍 사직리이다.
지세는 북서쪽으로 황해도의 명산인 구월산(九月山, 954m)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를 주봉으로 하여 오봉(五峯, 859m)·삼봉(三峯, 614m)·아사봉(阿斯峰, 687m) 및 먹산[墨山, 658m]이 각각 북쪽과 서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남으로 멸악산맥(滅惡山脈)이 뻗어 있으며, 송화군·벽성군에 이르는 경계에 차례로 천봉산(天峰山, 586m)·운계산(雲鷄山, 487m)·작산(鵲山, 593m)·대봉산(大峰山, 586m)·지남산(指南山, 623m)·성암산(城巖山, 468m) 등 연봉이 있다.
구월산맥과 멸악산맥의 사이에 광대한 평야가 전개되는데, 일명 ‘어우리벌’이라고도 한다. 천봉산과 운계산 주변을 근원으로 하여 부정천(婦貞川)과 척서천(滌暑川)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이들 하천은 대부분이 용문면·남부면·온천면 일대의 관개에 이용된다.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평야 지대를 통과하며, 곳곳에 큰 규모의 저수지가 있다. 구월산맥과 평야 사이에 용진저수지(用珍貯水池), 멸악산맥과 평야 사이에 용문저수지(龍門貯水池), 재령군과의 경계에 재신저수지(載信貯水池)가 있다.
기후는 겨울의 추위가 심한 편으로 1월 평균 기온 -6.5℃, 8월 평균 기온 25.4℃, 연평균 기온 10.8℃이며, 연 강수량은 954.3㎜이다.
[고 대]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접한 안악·송화 등지에서 다수의 신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었으므로 신천에도 신석기 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련면 명사리의 독무덤과 신천읍 양장리 등 유적에서 민무늬토기·유구석부·반월도·비파형동검·세형동검 등 여러 종류의 청동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명사리의 독무덤과 문화 구월산 유적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 또한 출토되었다.
삼국이 정립하기 전에는 대방군의 속현인 소명현(昭明縣)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며, 북부면 토성리의 토성을 그 터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신천 지역은 승산(升山)이라 하였다.
문화 지역은 궁홀(弓忽) 또는 궁올(弓兀)이라고 하였는데, 단군의 도읍지인 당장경(唐莊京)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하여진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757년에 두 지역 모두 중반군(重盤郡)에 소속되었고, 궁홀은 궐구(闕口)로 개칭되었는데, 구월산의 이름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단군이 승천하였다는 아사봉 아래에 있는 월정사는 고구려 장수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 려]
승산과 궐구는 태봉 때, 또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에 신주(信州)와 유주(儒州)로 개칭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주는 995년(성종 14) 거란을 막기 위하여 방어진으로 바뀌어 방어사 이하의 관원이 두어졌으나, 1012년(현종 3)에 폐지되고 황주의 속현이 되었다.
신천에 감무가 부임하기 시작한 것은 1106년(예종 1)부터로 짐작된다. 유주는 1018년풍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06년 감무가 부임하였고, 1259년(고종 46) 위사공인 유경(柳璥)의 고향이어서 문화현으로 승격되어 현령이 부임하였다.
[조 선]
신천현에는 1413년(태종 13)부터 현감이 부임하였고, 이곳 출신으로 명나라의 환관이 된 정동(鄭同)의 청에 의하여 1469년(예종 1)에 신천군으로 승격되어 군수가 부임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인구는 총 1,886호 5,425인이었으며, 문화보다 신천의 인구가 많았다. 신천향교와 문화향교가 각각 1393년(태조 2)에 창건되어 일찍부터 유학이 흥성하였다.
망일산의 자혜사(慈惠寺)는 고려 때 창건되었지만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원찰로서 유명하다. 1520년(중종 15)에는 문화현에 질병이 많이 돌아 건지산(乾支山) 북쪽에서 현재의 건지산 남쪽으로 읍이 옮겨 오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인구는 1759년(영조 35)에 총 1만 1965호 3만 6898인으로 증가하였으며, 이 가운데 문화현의 인구가 약 60%이어서 신천군보다도 인구 증가율이 높았다.
[근 대]
1895년 신천군과 문화군으로 편성되었다가 1914년문화군이 신천군에 합속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3월 11일 문화면의 동각리 장터에서부터 만세시위가 시작되었고, 경계가 심하였던 신천읍에서도 3월 27일 무정리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 4월 초순까지 군내의 만세 운동이 지속되었다.
1907년 의병 활동을 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의용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저격하여 즉사시킨 안중근(安重根)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밖에 서간도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을 모으다 지명수배가 된 상태에서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된 안명근(安明根)과 상해에서 거류민단장으로 김구(金九)를 돕는 한편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으로서 인재를 양성한 최중호(崔重鎬) 등이 있다.
1935년 당시 16개 읍·면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1942년의 인구는 총 2만 4701호 13만 2995명이었다.
이 군에는 단군과 관련되는 유물·유적 및 명승이 많이 있다. 구월산에는 단군이 승천하였다는 단군대와 아사봉이 있고, 산천면 대덕리 일대의 이른바 ‘장재이벌’에는 단군이 도읍을 정한 뒤 흙으로 쌓았다는 성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곳은 당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단군대는 단군이 나라의 수도가 될 고을을 전망하였다는 구월산에 있는 바위로 암벽의 앞면에 ‘檀君臺(단군대)’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글씨의 획이 희미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전에 새겨진 것 같다.
그 왼쪽 바위에는 단군의 발자국으로 전하는 두 개의 큰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부터 동남쪽으로 옛날 단군고도(檀君古都)로 전해지는 당장경의 옛터가 있는 산천면 대덕리와 용진면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단군대에서 삼성전(三聖殿) 터로 오는 길가에는 단군이 활을 쏘았다는 사궁석(射弓石)이 있는데 화살이 꽂혔던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군내의 여러 곳에 고인돌 및 고분군이 산재하여 있어 청동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우룡리·송오리 등의 고인돌군에서는 빗살무늬 및 민무늬토기류를 비롯하여 간석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한편, 신천읍 사직리·척서리·교탑리·대관리·송오리·우룡리 등지에는 한군현 시대의 유적으로 추측되는 고분이 많이 있으며, 감로(甘露)·대강(大康) 등 중국 진(晉)나라의 기년이 있는 문자전(文字塼)이 출토되었다.
신천읍을 둘러싸고 있는 화산(華山)·우령산·청양산(靑陽山)·봉황산 등이 읍내를 흐르는 부정천·누교천과 어울려 자연의 풍치가 수려하며, 여기에 곁들여 화산에 율사·문수암, 청양산의 망일암 등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구월산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패엽사(貝葉寺)와 월정사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로 손꼽힌다. 패엽사는 1,300여 년 전 신라의 구업대사(具業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월정사는 그보다 200년 앞서 창건되었다고 한다.
또, 남부면 청양리의 자혜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로 효령대군의 원당이 되기도 하였다. 이 절은 1572년(선조 5)에 중창되었으며, 대웅전에는 고려 초기의 금제 아미타여래상이 봉안되어 있고, 대웅전의 건축미도 뛰어나다. 대웅전 앞에는 보물급 유적인 자혜사오층탑과 석등이 있다.
자혜사오층탑은 높이 5.95m이며, 탑신에는 사람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또 기단부의 갑석과 상층면석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자혜사석등은 높이 3.88m이며 기단부 갑석에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높이 1.17m 되는 육각형 기둥 위에 감실을 올렸다.
신천객사는 화산관(華山館)이라고 하였는데, 신천의 옛 이름 ‘화산’에서 따온 명칭이다. 1726년(영조 2) 군수 이익형(李益炯)이 크게 중수하였다. 1911년에 이르러 일시 신천보통학교 건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천군의 옛 청사인 아사(衙舍)는 1672년(현종 13) 군수 이송령(李松齡)이 중건하였으며, 동헌을 절애헌(節愛軒)이라고 하였다. 관아의 뜰 북쪽에는 1809년(순조 9) 군수 이희(李羲)가 쟁야정(爭也亭)을 짓고 무사들의 활 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화산 동쪽 기슭의 신천향교는 1393년(태조 2)에 창건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에 중건하였다. 또 군내에는 척서정·유하정·망미정·통운정·석과정·일척정·흥풍정 등의 아담한 정자들이 산중이나 냇가에 위치하여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초리면 흥학리의 ‘흥률골’에서 흥률사(興律寺) 터로 가는 중간 지점에 오경문(午境門)이 있다. 지금은 문루는 없고 웅대한 돌로 만들어진 홍예문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북부면 우산리에는 우산포(牛山浦)가 있다. 예전에는 이 포구에 세곡으로 거두어들인 쌀을 쌓아 두는 창고가 있어서 선박의 내왕이 잦아 매우 번창하였으나 현재는 모래가 수로를 모두 메워 뱃길이 끊겼다.
천봉산 기슭의 청계동은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이 어릴 때부터 문무를 연마한 곳이다. 이 밖에 온천리의 신천온천, 달천리의 달천온천, 궁흥면 삼천리의 삼천온천 등이 유명하며, 조산(造山)의 북쪽에 있는 문정(文井)과 척서정의 동쪽에 있는 무정(武井)을 아울러서 일컫는 문무정(武文井)이 있다.
신천에서는 예로부터 문무의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바로 이 두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우물의 명칭이 유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척서정을 창건한 군수 이의봉(李義鳳)이 우물을 깊게 파고 수리한 때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군수 권기(權棋)가 다시 우물을 파내었으며, ‘문무정’이라는 글제로 백일장을 열어 화제가 되었는데, 그해에 이정일(李鼎鎰)이라는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당시에는 물맛이 좋고 수량도 풍부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두 우물이 폐쇄되었으며, 그 뒤로부터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교육기관의 효시는 1393년 신천감무 송거중(宋居中)이 화산 동쪽 기슭에 창건한 신천향교이다. 1558년(명종 13)에는 군내에서 처음으로 정원서원(正源書院)이 설립되었으며, 이어 1656년(효종 7)에 봉강서원(鳳岡書院), 1670년에 정계서원(程溪書院)이 설립되었다.
갑오개혁 후 신교육령이 반포되면서 안태훈(安泰勳)·김구·김익두(金益斗)·우종서(禹鍾瑞) 등 개화한 교육 선각자들의 눈부신 활약에 영향을 받아 사학(私學)이 크게 일어났다.
군내의 사학으로는 1907년 김익두가 신천읍 사직리에 설립한 경신학교(儆新學校), 1909년 우종서가 초리면 월산리에 설립한 종산학교(鍾山學校), 북부면 서호리에 양성학교(養成學校), 북부면 토성리에 혁신학교(革新學校)를 비롯하여 노월면에 신흥(新興)·삼성(三成)·영신(永信)·덕성(德成)·초당(草堂) 등의 학교가 있었다.
간이학교로는 남부면의 능동간이학교(陵洞簡易學校), 가련면의 사견간이학교(四見簡易學校) 등 8개의 학교가 있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30년 신천공립농업학교가 왕재덕(王在德)에 의하여 1년제 농민학교로 설립되어 1939년 5년제의 갑종 농업학교로 승격되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단 하나밖에 없던 갑종농업학교였다.
1944년 5월에는 신천공립여자농업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농업학교라는 명칭을 붙이게 되었으나, 실제의 교육과정은 인문계 고등학교와 같았다.
한편, 문학에 뜻을 둔 유한종(柳漢鍾)·조동찬(趙東讚) 등이 1933년 신천문예동맹을 만들어 문예 활동을 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하여 1년6개월 만에 강제로 해산되었다.
또한, 김구·안중근·안명근 등의 영향을 받아 3·1운동 후 신천구락부·여자기독청년면려회 등 사회·종교·문화 분야의 단체가 결성되어 국권 회복과 민중 계몽 및 민족문화 계발 등의 사회운동을 광복이 될 때까지 전개하였다.
산지가 적고 비옥한 농토가 광대하며, 관개 수리 사업이 잘되어 있어 기업적인 벼농사가 대규모로 발달하였다. 넓은 벌판인 어우리벌과 장재이벌이 있다. 어우리벌의 쌀 생산은 도내에서 2위를 차지하며, 품질에 있어서도 재령의 나무리벌과 함께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다.
그 밖에도 콩·팥·녹두 등의 잡곡과 목화가 많이 생산된다. 또한 연평균 44만㎏ 정도가 생산되는 잎담배는 전국에서 수위권을 차지하며, 특용작물인 박하는 도내 생산의 반을 차지한다. 그 밖에 배·복숭아 등의 과수 재배도 활발하여 많은 양의 과일을 생산한다.
시장으로는 1·9일의 신천장을 비롯하여 3·8일의 돌무지장과 유천장(柳川場), 5·10일의 문화장(文化場), 4·9일의 달천장(達泉場) 등이 있다. 주로 쌀·보리·콩·팥·조·면포·소 및 일용 잡화가 거래된다. 신천장과 문화장은 신천군의 2대 시장으로 널리 이용된다.
도로는 해안선이 없는 관계로 육로교통이 발달하여 신천읍을 중심으로 해주·재령·안악·은율·송화 방면으로 연결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1937년 장연선이 개통하여 물자 교류에 의한 상업도 아주 활발하다.
또한, 사리원을 시발역으로 하여 황해선이 재령-신천-송화-장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2등도로는 없으며, 3등도로가 신천읍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재령군, 서쪽으로 송화군, 남쪽으로 벽성군 온천리, 북쪽으로 안악읍, 서북쪽으로 문화-달천-은율로 이어져 사통팔달한 형세를 이룬다. 이 밖에도 북부면 우산리에 세미(稅米)를 운반하던 우산포가 있었는데, 지금은 포구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읍내를 흐르는 부정천과 누교천의 물은 물론, 용진면·궁흥면·초리면 일대의 냇물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든다. 일단 이곳에서 합쳐진 물은 다시 노월면의 굴산포(窟山浦)를 지나 안악군의 맞임재[延津]로 들어간다.
연안에는 동북으로 12㎞ 정도 어우리벌이 펼쳐진다. 지금은 배가 오가지 못하지만 옛날에는 세미를 배편으로 운반하는 포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포구 가까이에는 산천면 마명산(馬鳴山)에서 흐르는 마명천과, 문화면 건지산에서 흐르는 건지천이 합류하여 생긴 유명한 석연(石淵)이 있다.
두라면 천봉산 남쪽 기슭에 있는 청계동(淸溪洞)은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사방에 빼어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절승의 경관을 이루고, 또한 오목골들은 ‘별천지’를 연상하게 하여 많은 문인·묵객·은사 및 관광객들이 찾았다. 그 가운데 안중근이 2살 때부터 25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학문과 무술을 익힌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신천읍信川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18.6㎢, 인구 1만 6934명(193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사직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교탑리 등 9개 이를 관할하는 동부면이 되었으며 다시 신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37년 읍제 실시에 따라 신천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와 서부에 100m 내외의 구릉이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재령 나무리벌’의 서남부로 넓은 평야가 끝없이 전개된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도 잘되어 있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밀·팥·콩·조·메밀·박하 등이 생산된다. 1·9일에 열리는 신천장은 농산물·직물·소·일용잡화 등의 거래로 성황을 이루며 군내는 물론 인근 지방의 상인들로 붐빈다.
읍을 중심으로 동쪽의 재령, 서쪽의 송화, 남쪽의 벽성, 북쪽의 안악 방면으로 3등도로가 지난다. 또, 황해선이 읍을 동서로 횡단하며 신천역과 신천온천역이 설치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사직리·교탑리 등지에서 한사군 시대의 고분과 유품이 발굴되었다.
사직(社稷)·동양(東陽)·교탑(校塔)·대관(大館)·송오(松梧)·원암(猿巖)·무정(武井)·척서(滌暑)·양장(良長) 등 9개 이가 있다.
[가련면加蓮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56.4㎢, 인구 6,461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조우리이다. 지형은 만경산(萬京山, 302m)을 주봉으로 하는 남서부 산지와 공수산(貢壽山, 193m)을 주봉으로 하는 북서 구릉 지대로 양분된다. 그 사이로 전탄천(箭灘川)의 지류와 서강의 상류가 흘러 유역에 평지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하여 콩·보리·조·박하·과수 등이 재배된다. 근년에는 과수 재배 농가가 늘고 있다. 남서부의 산지와 북서부의 구릉지 사이로 3등도로가 횡단하여 신천읍과 신원리로 연결된다. 이 도로로부터 각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뻗어 있으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재령군과의 경계에 신천팔경(信川八景)의 하나인 명수정(明秀亭)이 있다.
조우(棗隅)·백련(百蓮)·백산(白山)·동령(東嶺)·명사(明沙)·난전(蘭田)·지봉(芝峰)·미산(眉山)·사견(四見)·월성(月城) 등 10개 이가 있다.
[가산면加山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4.8㎢, 인구 5,299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배촌리이다. 면의 중앙에 옥현산(玉峴山, 56m)을 비롯하여 100m 이하의 구릉이 솟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평지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하여 조·밀·콩·박하·과수 등을 재배한다. 근년에는 배·사과·밤 등의 과수를 재배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황해선이 남부를 횡단하며 백석·창촌(倉村)의 두 역이 설치되어 있다. 철도와 병행하여 3등도로가 통과하며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연결되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배촌(裵村)·은천(銀川)·간성(干城)·백석(白石)·송련(松蓮)·서정(西井)·용천(龍川)·용두(龍頭) 등 8개 이가 있다.
[궁흥면弓興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4㎢, 인구 7,454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만궁리이다. 면의 동남쪽에 운계산이 솟아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이다. 다만 곳곳에 100m 내외의 구릉이 있다. 구릉의 사이를 달천천의 상류가 흘러 그 유역에 기름진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경작지로 이용된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쌀을 비롯하여 콩·보리·박하·팥 등이 생산된다. 삼천리를 중심으로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통하고 있다. 황해선이 중앙부를 동서로 횡단하며 삼천온천·궁흥의 두 역이 있다. 삼천리에 있는 삼천온천은 탄산천으로 약효가 뛰어나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만궁(彎弓)·삼천(三泉)·치수(雉峀)·문박(文朴)·용천(龍川)·월봉(月峰)·농사(農司)·오원(五院)·응봉(鷹峰)·석정(石井)·금천(金川)·용암(龍巖)·성암(星巖) 등 13개 이가 있다.
[남부면南部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2㎢, 인구 7,713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부리이다. 동쪽에 만경산, 남쪽에 천봉산, 서쪽에 망일봉(望日峰, 288m)이 있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만은 틔어 있어 서강의 지류가 북쪽으로 흐른다.
강의 유역에는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되어 신천평야로 이어진다. 토지가 비옥하며 수리 시설도 잘되어 신천저수지에서 물을 공급받는다.
1930년 서강의 상류를 막아 신천저수지를 만들어 부근 전답의 관개에까지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하여 콩·조·보리·박하 등을 재배한다. 근래에는 박하·사과·잎담배 등을 재배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신천읍과 태탄(苔灘) 사이의 3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여기서부터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나 있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청양산 아래에 있는 자혜사의 옛터에는 대웅전·오층탑·석등 등이 남아 있다. 청양리에는 정원서원의 유적이 전해지며 이 밖에 능동리의 고인돌 2기를 비롯하여 곳곳에 고인돌이 남아 있다.
서부(西部)·부정(婦貞)·한은(閑隱)·마산(馬山)·봉황(鳳凰)·서원(書院)·능동(陵洞)·비봉(肥鳳)·천봉(天峰)·청양(靑陽)·화남(花南) 등 11개 이가 있다.
[노월면盧月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8.5㎢, 인구 9,319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국리이다. 동북쪽에 월호산(月扈山, 160m)이 솟아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낮은 지대를 이룬다.
남북으로 3㎞, 동서로 13㎞의 좁고 긴 땅이다. 달천천과 그 지류에 전개되는 유역 평야는 어우리벌의 중심지이며 재령평야로 이어진다.
토지가 비옥하며 수리 시설이 잘되어 있어 농산물의 경작에 좋은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콩·조·보리·박하 등이 있다.
근년에는 곳곳에서 과수 재배가 활발해져 포도·배·살구 등이 많이 생산된다. 안악읍과 신천읍 사이의 3등도로가 서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달천천을 따라 등외도로가 뻗어 있으나 교통은 대체로 불편하다.
오국(五局)·설매(雪梅)·마명(馬鳴)·초당(草堂)·청룡(靑龍)·성월(星月)·쌍교(雙橋)·고초(高草)·동성(東城)·구창(舊倉)·월음(月陰)·굴산(屈山)·덕성(德成)·정례(貞禮)·의둔(宜屯) 등 15개 이가 있다.
[두라면斗羅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3㎢, 인구 4,494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동리이다. 면의 남쪽에 병풍산(屛風山, 612m)·성암산, 서북쪽에 천봉산 등이 솟아 산악 지대를 이룬다.
이러한 산의 여맥이 전역으로 뻗어 내려 각처에 200∼300m의 구릉이 솟아 있다. 다만, 전탄천의 상류와 그 지류가 동북부를 흐르면서 유역에 소규모의 평지를 형성하여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룬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쌀을 비롯하여 조·콩·보리·박하·잎담배·과수 등이 재배된다. 근년에는 잎담배와 과수 재배에 힘쓰는 농가가 늘고 있다. 산악 지대인 만큼 곳곳에 소규모의 제재소가 있다. 쌍천리를 기점으로 각 방면으로 등외도로가 통할 뿐 교통이 불편하다.
천봉산 기슭의 청계동에는 안중근의 본가가 있으며, 일제에 항거한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사동에는 바위 사이로 용출하는 찬 약수가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원동(院洞)·간동(間洞)·백운(白雲)·봉래(蓬萊)·삼산(三山)·쌍천(雙川)·신전(新田)·청계(淸溪)·청산(靑山) 등 9개 이가 있다.
[문무면文武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2㎢, 인구 5,426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추릉리이다. 면의 서북쪽에 월강산(月江山, 331m)·비산(飛山, 583m), 그 동쪽에 익구봉(益口峰, 441m) 등이 솟아 서북부는 대체로 산지를 이룬다.
그러나 동남부에는 서강의 지류인 달천천이 북동으로 흘러 그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었는데,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 시설이 잘되어 이 면의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룬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하여 목화·밀·조·콩·잎담배 등이 재배된다. 특히, 목화와 잎담배의 수확량은 군내에서 손꼽힌다. 추릉리를 중심으로 2등도로가 동쪽으로 신천읍에, 서쪽으로 은율읍에, 남쪽으로 황해선의 삼천온천역에, 북쪽으로 산천면에 통하고 있으나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추릉(楸陵)·괴정(槐亭)·월남(月南)·동곡(桐谷)·묘각(妙覺)·추령(杻嶺)·고현(古縣)·건산(乾山)·양암(陽巖) 등 9개 이가 있다.
[문화면文化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58.1㎢, 인구 7,423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각리이다. 본래 독립된 문화현이었는데, 1895년(고종 32) 부제(府制)가 실시되면서 해주부에 속하는 문화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가 실시되자 황해도의 3등군이 되었다. 1909년 신천군으로 편입되면서 문화면이 되었다.
남서쪽에 운계산, 동쪽에 우령산이 솟았을 뿐 그 밖의 지역은 평야 지대이다. 다만, 이들 산악의 여맥이 뻗어 내려 곳곳에 100m 내외의 구릉을 기복시킨다. 구릉의 사이를 서강의 지류가 흐르며 그 유역에 기름진 평야가 전개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조·콩·보리·잎담배·박하 등을 경작한다. 근년에는 과수·박하·잎담배 등을 재배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5·10일의 문화장은 군내 7대 시장의 하나로, 소·쌀·콩·팥 등이 주로 거래된다.
황해선이 남부를 동서로 횡단하며 문화역이 설치되어 있다. 신천읍과 은율로 통하는 3등도로가 북부를 통과하며, 동각리를 기점으로 등외도로가 주요 마을로 통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1393년 창건된 동각리의 향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역사 깊은 향교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동각(東閣)·서정(西亭)·탄현(炭峴)·천내(川內)·덕천(德泉)·수장(壽長)·용현(龍峴)·연봉(蓮峰)·용산(龍山)·화암(花巖)·화산(花山) 등 11개 이가 있다.
[북부면北部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3.6㎢, 인구 9,342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석당리이다. 지형은 우령산의 남북단을 저변(底邊)으로 하고 우산리를 정점(頂點)으로 하는 삼각형을 이룬다. 우령산의 여맥이 면내로 뻗어 내려 몇 개의 구릉이 평야 가운데로 솟아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지이다.
서강의 지류가 북단과 동남단을 흘러 그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면의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룬다. 특히, 재신수리조합의 몽리 지역(蒙利地域)에 속하여 농경에 큰 도움을 받는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콩·팥·보리·조·과수 등을 경작한다. 부업으로 직물 짜기와 가축 기르기 등이 행하여진다. 3·8일의 돌무지장에서는 쌀·조·면포·소·일용 잡화 등이 거래된다.
신천읍과 안악읍 사이의 3등도로가 남북으로 종단하고, 신천읍과 문화구읍 사이의 2등도로가 서부를 통과한다. 그 밖의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통하여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우산리는 수륙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 세곡으로 거두어들인 쌀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다.
석당리 사람을 가리켜 ‘돌무지 경우(耕牛)’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어우리벌대토목공사 때 외지에서 밀려온 노무자를 말하는 것이지, 석당리 본토인을 가리켜 한 말은 아니다.
석당(石塘)·동창(東倉)·서호(西湖)·신풍(新豐)·토성(土城)·수철(水鐵)·산죽(山竹)·야죽(野竹)·청산(靑山)·승도(蠅島)·남천(南川)·우산(牛山)·구동(舊洞) 등 13개 이가 있다.
[산천면山川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60.7㎢, 인구 9,698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경지리이다. 면의 북쪽에 고령산(古靈山), 서쪽에 전산(錢山) 등의 구릉이 있지만,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평야를 이루어 어우리벌의 서북 지대를 형성한다. 평야의 중심부를 달천천과 그 지류가 흐르며, 안신저수지(安信貯水池)가 준공되면서 연안의 경작지가 옥토로 변하였다.
따라서, 미곡의 수확량이나 품질에 있어서 재령의 나무리벌과 함께 손꼽히는 쌀 생산지가 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하여 조·밀·콩·과수 등을 경작한다.
경지리를 기점으로 하여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개설되었을 뿐 교통이 불편하다. 대덕리에 있는 장재이벌에는 토성지(土城址)가 있는데,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당장경으로 추정된다.
경지(境地)·용동(龍東)·순흥(順興)·용월(龍月)·한양(漢陽)·용정(龍亭)·강촌(江村)·산현(山峴)·대덕(大德)·동산(東山)·사산(四山)·월송(月松)·송오(松塢)·천내(川內)·사읍(沙邑) 등 15개 이가 있다.
[온천면溫泉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3.5㎢, 인구 8,811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온천리이다. 마식령산맥의 여맥이 동북단에서 뻗어 내려 각처에 100m 이하의 구릉을 기복시키지만 산지보다는 평야가 많다.
북부에 서강이 동서로 흐르고 남부산지에서 발원하는 여러 작은 내들이 이 강으로 합치는데 본 지류 유역에 넓은 평야가 형성된다.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도 잘되어 있어 미작의 모범지로 꼽힌다. 전작물로는 콩·조·밀·보리·박하 등의 산출이 많다. 황해선이 면의 서북단을 통과하며 주민들은 신천온천역을 이용한다. 2등도로가 철도와 병행하여 달리며, 각 주요 마을로는 등외도로가 개설되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500년 전부터 일반에 알려진 신천온천은 주위의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온천 자체도 특유해서 찾아오는 인파로 항상 붐빈다. 물이 38개의 용출구에서 내뿜으며 수량이 풍부하고 일년 내내 50∼58℃의 고온을 유지한다.
온천(溫泉)·운봉(雲峰)·장재(長財)·추산(楸山)·고송(古松)·용구(龍口)·진우(榛隅)·용당(龍塘)·산수(山水)·송정(松亭)·발산(鉢山)·한정(寒井) 등 12개 이가 있다.
[용문면龍門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8㎢, 인구 7,194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황리이다. 본래 송화군의 상룡문면(上龍門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천군에 편입되었다.
남쪽에는 작산·양웅산(養雄山, 545m) 등이 솟아 있어 대체로 산지를 이룬다. 서북쪽으로는 운계산이 솟아 있으며, 남부 산지와의 사이를 서강의 지류가 동서로 흘러 그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평지가 형성되어 주요 생산 지대이자 거주 지역을 이룬다. 토지가 비옥하고 용문저수지가 관개에 큰 도움을 주게 되자 품질 좋은 쌀의 산지로 유명해졌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조·콩·보리·박하 등이 있다. 황해선이 북부를 동서로 지나며 용문역이 설치되어 있다. 신천읍과 장연읍을 연결하는 3등도로가 북서부를 통과하며, 각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통하여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취락의 구조가 다른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산촌형(散村形)을 이루고 있다.
삼황(三皇)·반정(泮亭)·청송(靑松)·복우(福隅)·사창(司倉)·성당(聖堂)·남산(南山)·매추(梅秋)·냉정(冷井)·사정(射亭) 등 10개 이가 있다.
[용진면用珍面]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74.5㎢, 인구 6,174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천리이다. 면의 서쪽 경계에 구월산이 솟았고, 그 주맥은 동쪽으로 뻗어 북부에서 오봉·삼봉 등이 되고, 서쪽으로 뻗어서 아사봉이 된다. 이러한 지세로 인하여 서북부 산지와 동남부 평야 지대로 나누어진다.
동남부의 평야 지대를 달천천의 상류와 그 지류가 흐른다.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 시설도 잘되어 벼를 비롯하여 콩·보리·잎담배 등이 풍부하게 경작된다.
구월산에서는 잣과 송이버섯이 산출되는데 그 풍미가 널리 알려져 있다. 3·8일에 열리는 유천장에서는 쌀·콩·밀·소 등이 주로 거래된다.
유천리를 중심으로 주요 마을에 등외도로가 통하지만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구월산 동쪽 기슭에 유명한 패엽사(일명 寒山寺)가 있다. 31대 본산의 하나로 구월산중에 있는 월정사·낙산암(洛山庵)·묘각사(妙覺寺) 등 25사를 관할한다.
절 앞의 봉우리에는 단군대·삼성전 등이 있다. 패엽사에서 남쪽으로 20리 되는 지점에 아사봉이 솟아 있는데, 단군이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곳이라 전한다.
유천(柳川)·석성(石城)·삼봉(三峰)·삼성(三聖)·패엽(貝葉)·운계(雲鷄)·월정(月精)·박달(朴達)·사문(士文)·현천(玄川) 등 10개 이가 있다.
[초리면草里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70.6㎢, 인구 5,935명(193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달천리이다. 면의 동북쪽에는 구월산맥에 속하는 아사봉이 솟아 동남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고, 서북쪽에는 먹산이 솟아 역시 동남으로 경사를 이루었다. 두 산의 여맥이 곳곳으로 뻗어 내려 구릉을 기복시킨다. 그러나 중앙부에서 남쪽으로는 대체로 평지가 전개된다.
상산봉(上山峯)을 분수령으로 동쪽에는 구월천(九月川)이 흘러 서강으로 들어가며, 서쪽에는 두 줄기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남대천에 합쳐진다. 하천 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형성되어 주요 생산 지대를 이룬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벼를 비롯하여 조·콩·보리·잎담배·박하 등을 경작한다. 잎담배와 박하의 수확량이 다른 면에 비하여 훨씬 많다. 4·9일 달천장에서는 쌀·콩·팥·보리·일용 잡화 등이 주로 거래된다.
신천읍과 은율읍 사이의 3등도로가 면의 중앙을 횡단하며, 달천리를 중심으로 주요 마을로 등외도로가 개통되어 교통은 불편하지 않다. 달천리의 달천온천(일명 종달온천)은 신라 시대부터 알려진 유황온천으로, 수온이 50℃이며 수량이 풍부하다.
유적으로는 흥학리에 흥률사와 오경문이 있다. 온천의 동북쪽에는 유릉(柳陵)이라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조상묘가 있다.
달천(達泉)·청산(靑山)·백현(白峴)·용학(龍鶴)·거문(巨門)·수원(水源)·신명(新明)·월산(月山)·도명(道明)·흥학(興鶴) 등 10개 이가 있다.
1952년 행정구역 개편 시 옛 신천군의 서부는 분리되어 삼천군이 신설되었고, 동부의 문화면·문무면 일부와 북부면·남부면·용문면·가산면·신천읍·온천면·가련면·두라면, 벽성군의 검단면으로 개편되었다. 1954년 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눌 때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황해남도의 중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재령군, 서쪽은 삼천군·태탄군, 남쪽은 벽성군·신원군, 북쪽은 안악군과 접하여 있다. 동경 125°21′∼125°38′, 북위 38°10′∼38°26′ 사이에 있으며, 면적 467㎢, 인구 13만 4500여 명이다.
행정구역은 신천읍과 서원(書院)·반정(泮亭)·우룡(牛龍)·원암(猿巖)·새길·발산(鉢山)·용당(龍塘)·온천(溫泉)·송오(松梧)·백석(白石)·명석(明石)·새날·우산(牛山)·석당(石塘)·청산(靑山)·화산(花山)·건산(乾山)·용산(龍山)·사창(司倉)·복우(福隅)·근로자(勤勞者)·월성(月城)·석교(石橋)·호암(虎巖)·명사(明沙)·동령(東嶺)·이목(梨木)·도락(道樂)·냉정(冷井)·지남(指南)·장재(長財) 등 31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신천읍이다.
군의 북쪽은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남부천·전탄천 등이 흐르고, 그 유역은 재령평야의 일부를 이룬다. 이들 강에는 각각 복우(福隅)·서원(書院)·명수(明水)저수지 등이 조성되어 있다.
언진산맥의 잔구로 우령산(雨靈山, 271m)이 남아 있다. 동서쪽 군계는 재령·신천·삼천·송화·과일군이 연결되는 평지가 계속되어 곡창을 이루고 있는데, 낮은 공수산(貢壽山, 193m)이 간신히 잔구 흔적을 남기고 있다.
군의 남부는 멸악산맥이 서쪽으로 뻗어 내리며, 성암산·병풍산(屛風山, 612m)·지남산 등의 잔구를 남겨 신원군·벽성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남산과 그 북쪽에 있는 천봉산과의 사이에 지남저수지가 있다.
서쪽에는 멸악산맥의 달마산(達磨山, 596m)에서 북쪽으로 작산·운계산 등이 솟아 있다.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주를 이루고, 규암도 많이 분포한다.
연평균 기온은 9.8℃, 1월 평균 기온은 -8℃, 8월 평균 기온은 24.0℃이며, 연 평균 강수량은 900∼1,000㎜이다. 토양의 대부분은 산림갈색토이며, 충적토도 널리 깔려 있다. 산림은 군 전체 면적의 40%가량을 차지하며, 소나무·참나무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군은 복우·서원·명수저수지 등이 축조되어 있고, 재령강과 서강의 여러 지류들에 의하여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 있어서 벼농사를 비롯하여 밭농사도 활발하다. 옥수수·밀·보리·조·담배가 생산되고, 사과·배·복숭아 등의 과일 생산량도 많다.
신천에는 북한에서 자랑하는 구월산담배공장이 있다. 간단한 기계공장, 방적공장도 가동되고 있다. 공업생산량은 도내에서 해주 다음으로 많은 군이다.
교통망으로는 군의 중앙을 은파와 서해리를 연결하는 은율선이 횡단하고 신천을 중심으로 해주·벽성·사리원·삼천·안악에 이르는 도로가 통하고 있다.
신천에서 동쪽으로 3㎞가량의 거리인 온천리에 신천온천이 있는데, 이 온천은 50∼58℃의 온도이며, 위장병·피부병·부인병·신경쇠약 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적으로는 신천향교와 문화향교가 있으며, 신천에서 남쪽으로 4㎞ 가량의 거리에 있는 서원리에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자혜사(慈惠寺)가 있다. 이 절에는 오층탑과 석등이 있으며, 대웅전에 고려 초에 만들어진 동제아미제여래상(銅製阿彌陀如來像)이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