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회는 1923년 말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자치운동단체이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3년 12월에 연정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5년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부활 계획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1927년 신간회의 결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3 · 1운동 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민족운동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23년에 들어가면서 두 방향의 민족운동이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운동 계열은 절대 독립을 지향하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자력(自力) 독립이 어렵다는 인식 아래 식민지 조선의 내정(內政)을 확보하자는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나뉘게 되었다.
1923년 12월에 김성수, 송진우, 이승훈, 최린 등이 모여 식민지 조선인의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 연정회(硏政會)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 단체의 결성에는 『동아일보』 ‧ 『조선일보』 계열의 언론인, 천도교 신 ‧ 구파, 기독교계 인사 등이 참여하였다.
‘자치(自治)’ 논의의 연장선에서 1924년 1월 2∼6일에 걸쳐 『동아일보』에 이광수가 「민족적 경륜(民族的經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는 식민지 조선 안에서 일제권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정치 · 산업 · 교육적 결사운동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연정회 설립 계획은 무산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자치운동’은 민족운동의 영역이 아닌 정치운동의 영역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인의 정치운동은 일제와 동일시되는 ‘동화론(同化論)’, 일본 정계에 참여하는 ‘참정권론(參政權論)’, 군사와 외교 등을 제외한 내정의 독립을 주장하는 ‘자치론(自治論)’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화론’과 ‘참정권론’이 친일 세력이었다면, ‘자치론’은 타협적 민족주의자와 함께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인사들이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연정회를 다시 설립하고자 하는 활동이 재개되었다.
1925년 말부터 조선총독부는 자치제 실시에 관한 논의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의 보통 선거로 무산정당(無産政黨)의 출현과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북벌(北伐)’이란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자치론자들은 다시금 연정회의 부활을 추진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차별화된 『동아일보』 계열과 천도교 신파, 기독교 계열이 재차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자치운동 추진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강력히 반대하였고, 이들은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따라서 제2차 자치운동 계획은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