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윗청년회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개신교 청년 단체이다. 의법청년회라고도 한다. 1897년 한국선교연회에서 조이스 감독이 엡웟청년회의 설립을 권면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체결되자 상동교회 청년들이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1906년 엡웟청년회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1916년 재건된 엡웟청년회는 전도대회, 문맹퇴치, 한글교육 등 농촌 계몽 활동을 하였다. 심훈 작 『상록수』의 주인공인 최용신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1949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창립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7년 제13회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의 결정으로 창립한 청년단체이다. 창립이후 한국 청년운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 담당하였다.
제13회 미감리회 한국선교연회(1897. 5. 5 ~10)가 조이스(I. W. Joyce)감독의 주재하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선교연회에서 조이스 감독은 엡웟청년회의 설립을 권면하였고, 회원들이 이를 받아들여 엡웟청년회 설립이 결정되었다. 곧 이어 존스(Gh. H. Jones, 趙元時), 노블(W. A. Noble, 魯普乙), 페인(J. O. Paine, 陛仁), 노병선, 김기범, 이은승 등이 위원으로 선임되어 연합회 중앙조직이 구성되었다.
이후 연합회 산하 개 교회 청년회가 속속 조직되었다. 먼저 인천 내리교회 나인데 청년회를 시작으로, 1897년 9월 5일 상동교회 말랄류청년회, 같은 해 9월 22일 평양 남산현교회 굿셀청년회, 이윽고 정동교회에서도 같은 해 10월 28일 남(워렌청년회), 여(조이스청년회) 청년회가 각각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6개월 후에는 미감리회 선교거점이었던 인천, 서울, 평양 등지에 5개의 청년회 지회가 설립되었고, 회원수도 150명에 이르렀다. 한편 남감리회에서도 선교거점인 개성에서 1902년에 엡웟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엡웟청년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체결되자 전덕기, 정순만 등 상동교회 청년회원들이 조약에 항의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1906년 열린 한국선교연회에서 엡웟청년회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친일인사로 유명했던 해리스(M. C. Harris)가 이 연회를 주재했었는데, 연회를 마치고 난 후 잡지사 인터뷰에서, “연회 개회중에 엡웟청년회 대회를 열고 싶다고 했으나 결국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청년들은 걸핏하면 종교 집회를 명목으로 국사를 열심히 논하고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결국은 분규를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엡웟청년회에 대해 반감을 표하였다. 1908년 제물포교회의 요청에 따라 존스 선교사가 엡웟청년회의 재조직을 건의하였으나 이 또한 묵살되고 말았다.
하지만 1916년 조선연회에서 이익모, 이하영, 손정도, 김유순 등 한국인 연회원들의 청원으로 엡웟청년회의 재조직이 결정되었다. 이후 개 교회 청년회가 속속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삼일운동이후 청년운동 전체가 활기를 띄면서 개 교회 청년회 조직결성은 더욱 활발해 졌다. 1920년대 말까지 미감리회 엡웟청년회는 전국 13개 지역에 전체회원 2천여 명을 웃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남감리회 엡웟청년회도 가파르게 성장하여, 전국에 72개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전체회원은 2천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청년회 조직과 활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개 교회 차원의 청년회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전국연합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5년 9월 남감리회 웹웟청년회 전국연합회가 먼저 결성되었고, 이윽고 1929년 6월 미감리회 웹웟청년회 전국연합회도 그 뒤를 이었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현 기독교대한감리회)가 탄생하였다. 감리교회가 통합함에 따라 엡웟청년회는, 교파 통합에 따라 새로 조직된 총리원 교육국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엡웟청년회는 명실 공히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청년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1931년 7월에 「조선엡웟청년회연합회」도 창립총회를 열고 새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창립총회에서 선임된 초대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이후 청년회연합회는 1933년까지 26개 지역에서 177개 청년회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종교간섭이 심화되고 조선감리회 또한 일본 감리교회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시작하면서 엡웟청년회는 또 한 번 해산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즉 1938년 엡웟청년회는 지도감독을 맡고 있던 총회 교육부 총무가 『조선감리회보』 11월 1일자에 게재한 공문, “엡웟청년회 현하 비상 시국에 감(鑑)하여 지난 제3회 총회에서 엡웟회는 정지하고, 교회내 청소년들의 전신수양은 주일학교 청소년부에서 하기로 결정하였아오니 하량하시고 엡웟회는 해산하시옵 소화13년(1938) 10월 27일 교육부 총무 유형기”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일제말기 개신교 교파들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폐합되었다가, 해방 이후 속속 재건하면서 감리교회도 1949년 4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재건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21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청년회 전국연합회」가 창립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기 웹웟청년회 가입조건은 1) 감리교인이어야 하고, 2) 15세에서 35세(평양 남산현교회의 경우 40세)로 한정되어 있었다. 조직으로는 6개월 임기의 회장, 부회장, 서기 등의 임원과 임원국(협의), 전도국(선교), 인제국(봉사), 학문국(교육), 다정국(친교), 통신국(서기), 회계국(재정) 등의 부서로 각각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부서활동을 통해 웹웟청년회는 교회 안팎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특히 상동교회 청년회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은 엡웟청년회 활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1916년 재건된 엡웟청년회는 전도대회를 개최한다든지 전도 강연회를 개최하여 청년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재건이후 엡웟청년회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교육활동이었다. 개 교회 청년회는 유치원, 야학, 주일학교 등에서 문맹퇴치, 한글교육 등 부녀/아동들을 대상으로 계몽활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체육대회나 연극공연을 개최하여 체육/예술 활동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 더욱이 1920년대 중반부터 농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엡웟청년회가 이에 앞장섰다. 심훈 작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최용신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