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왕창동(王昌東). 충청북도 청원 출신. 1896년 3월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유근(柳瑾)·나철(羅喆)·안창호(安昌浩)·남궁 억(南宮檍)·양기탁(梁起鐸) 등 367명과 더불어 잡혔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재미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지도자로서 활약하였으며, 1905년 만주로 망명, 간도 용정(龍井)에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키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7년 안창호·김구(金九)·이동녕·양기탁·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헤이그특사의 여비 1만 8000원을 한민회장(韓民會長) 김학만(金學萬)과 함께 그곳 교포로부터 모금, 전달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이범윤(李範允)·이상설·이동녕·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안창호·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노령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연해주(沿海州)지역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을 발간하였다. 또 이후 13도의군부(十三道義軍府)·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관일약(貫一約)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 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에 사망하였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