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고종 22)에 조선 입국한 스크랜턴은 정동교회 근처에 정동감리교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다가, 의료사업을 확장하기로 하고 남대문 근처인 지금의 상동교회 자리를 구입하여 약국과 병원을 차려 의료선교와 복음선교를 겸함으로써 오늘의 상동교회가 시작되었다.
1893년(고종 30) 이 병원교회가 정식으로 구역회로 승격되어 스크랜턴이 담임목사로 임명되었고, 1895년(고종 32) 정동병원을 상동병원으로 통합하여 상동교회 자리는 전적으로 병원으로 사용하고, 교회는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인 달성궁(達城宮)으로 옮겨 비로소 교회와 병원이 분리되었다.
1900년 7월 상동병원이 세브란스병원과 통합되자, 그 자리에 현대식 교회건물을 신축, 1901년 6월에 준공을 보아 교회를 옮기고, 1902년부터 전도사 전덕기(全德基)가 맡아보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덕기를 중심으로 한 조약무효투쟁이 전개되어, 김구(金九) · 이준(李儁) 등의 독립투사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1907년 이 곳 지하실에서 헤이그특사사건의 모의가 이루어졌으며, 같은 해 이 곳에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어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중등교육기관으로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시켜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914년 전덕기가 신민회 사건으로 순직하고 상동청년학원도 폐교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으며, 민족항일기 말기에 이르러서는 교회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져, 1944년 3월 마침내 폐쇄되어 일제의 신사참배와 소위 황도정신(皇道精神)의 훈련장인 황도문화관으로 바뀌었다.
8 · 15광복을 맞아 재건되었으나 6 · 25전쟁으로 교회건물이 많이 파괴되었으므로, 1974년 10월 벽돌예배당을 헐어 현재의 12층 건물을 신축, 7층 이상을 교회로 사용하고 지하층과 지상 4층까지는 백화점으로 사용하여, 여기서 나오는 이윤을 전적으로 선교사업에 충당하고 있다.
수원의 삼일상업고등학교와 삼일공업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미자립교회에 대한 원조사업 등 광범위한 기업선교를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기독교 100년사에 새로운 선교유형을 만들어내었다. 개신교 100여 년의 역사를 함께 걸어온 상동교회는 현재 이성조 목사가 제26대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상동교회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계획한 역사적인 현장이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독립운동에 활용되었던 장소로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