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 9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작은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났다. 1892년 스크랜톤(Scranton, M. F.)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尙洞敎會)에 입교하였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에 의하여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이 협회의 핵심적 간부로 독립 운동가들과 친교를 두터이 하였다.
독립협회의 목적인 자주독립·자유민권사상과 자강개혁운동(自强改革運動)은 기독교복음의 내용과 일치함을 깨달았고, 그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민족운동과 직결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톤을 도와 목회에 전념하였다. 1902년에는 감리교선교회에서 전도사 임명을 받고 본격적인 목회활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당시의 엡웰 청년회)를 소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약체결에 협조한 을사오적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기 위하여 정순만과 더불어 평안도 출신 장사 수십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계획은 일본경찰에 의하여 저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1907년에는 이준(李儁)과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거사계획을 성사시켰다.
같은 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민족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는 데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04년 그가 상동교회 안에 세운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은 1907년부터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어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감리교 연회(年會)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가 되면서 당시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으로 불리는 ‘신민회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도 이 사건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이 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