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고아원은 1905년 서울에서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고아원이다. 1905년 설립된 보생고아학교가 전신으로 1907년 고아원으로 개편되었다. 대한제국의 관료였던 이필화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고아를 구제 교육하여 충군애국하는 인물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고아원은 고아, 미아, 기아를 수용하여 의식과 교육을 제공하였고, 각계 각층으로부터의 후원금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개원 초기부터 재정난을 겪으며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한성부에 경영권이 넘어갔고, 1912년 조선총독부 제생원으로 흡수되었다.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의 주1를 모집하여 주2을 제공하고 교육시켜 주3'하는 인물로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대한제국 관료였던 이필화에 의해 1905년 설립되었다.
한국에서 주4이 설립된 것은 19세기 말로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1886년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천주교 명동성당과 인천성당이 각각 1888년과 1895년에 부속고아원을 설립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고아원은 없어서, 경성고아원은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고아원이다.
경성고아원은 원래 1905년 보생고아학교(普生孤兒學校)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가 1907년 경성고아원으로 개편되었다. 설립자 이필화는 철저한 유교 신봉자로 알려져 있으며, 1900년 혜릉령(惠陵令), 1902년 상공학교 교관, 1904년 한성부 판윤, 시종원(侍從院) 시종 겸 장예원(掌禮院) 장예, 1906년 제실회계심사국(帝室會計審査局) 주사 등으로 재직한 관료였다. 고아원은 고아, 미아, 기아를 수용하여 단발시키고 의복과 음식, 교육과 의료 등의 혜택을 제공하였다. 1907년 당시 수용된 원아 수는 고아가 82명, 유아가 11명으로 대체로 100명 내외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아원의 운영 자금은 각계 각층으로부터의 후원금과 자선연주회 등을 통한 기금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설립 초기부터 재정난으로 운영이 어려워 내부 갈등이 자주 빚어졌고, 설립자 이필화와 그의 아들 이우선이 경영권을 두고 임직원 및 원생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중재에 나선 한성부가 고아원의 경영권을 접수함으로써 고아원은 사립에서 관립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경성고아원은 황실의 하사금과 학부 보조금,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1912년 조선총독부 제생원(濟生院)으로 흡수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