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신은 일제강점기 평양 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남편은 독립운동가 김예진이다. 1919년 평양 3·1운동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1920년 8월에는 김예진이 참여한 평안남도청 폭탄 투척 사건에 사용된 폭탄을 운반하였다. 1922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에게 은닉처를 제공하고, 인구세를 납부하는 등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 외 기독교여자절제회 활동도 하였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895년 7월 5일 평안남도 고평군 신흥리에서 한성은(韓聖殷)과 홍필례의 2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이명은 '탄실이'이다. 1915년 20세에 김예진(金禮鎭)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다.
1919년 2월 평양 3·1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1920년 8월에는 남편 김예진이 참여한 평안남도청 폭탄 투척 사건에 사용된 폭탄을 직접 운반하였다. 1921년부터 신흥학교, 평양고무공장 등에서 근무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자금을 모아 상하이[上海]로 건너간 남편에게 활동비를 보냈다.
1922년 아이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요인들에게 은닉처를 제공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조선인 유학생들을 돌보며 기독교여자절제회 활동도 하였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인구세(人口稅)를 납부한 사실도 확인된다. 1926년 김예진이 상하이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진 혐의로 체포되어 압송되자, 평양으로 돌아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1928년 12월 2일에 김예진이 석방된 이후 7년간 작은 시골 교회를 돌아다니며 목회 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일본 관헌에 의해 수차례 예비 검속을 당하였고,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해방 후 남편 김예진이 한국전쟁 와중에 사망하자,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삼일동지회, 대한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68년 자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나성국민회 여성부에서 활동하였다. 1986년 2월 19일 92세의 일기로 미국에서 사망하였다.
한도신 사후 생전의 기록을 모아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돌베개, 1996]가 출간되었다.
1963년 서울시로부터 모범어머니상을 받았고,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