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생으로 추정되며,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1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이명은 현인권(玄仁權)이다.
17세 때 대구기생조합 소속 주1가 되었다. 1913년 손님으로 찾아온 현정건(玄鼎健)과 사랑에 빠졌으며, 현정건이 중국으로 간 후 서울로 이주하여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에 들어갔다. 1917년에는 다동기생조합을 나와 영호남 출신 기생들과 함께 한남기생조합(漢南妓生組合)을 창립하였다. 현계옥은 이 무렵부터 사상기생의 모습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의기(義妓)인 논개와 계월향(桂月香)의 사당 중수(重修)에 관여한 일로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19년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밀입국한 현정건과 해후하고 그의 독립운동 동지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그해 서울을 떠나 지린[吉林]에서 현정건과 합류한 뒤, 1920년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현정건과 함께 상하이에 머물면서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폭탄 투척법과 주2 쏘는 방법을 배우고, 거사용 폭탄의 제조와 운반을 돕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3년에는 경기도경찰부 경부 황옥(黃鈺)이 의열단 단원과 접선하여 국내에 폭탄을 밀반입하려 한 사건에 관여하였다.
1925년 이후에는 현정건이 청년동맹회를 주축으로 사회주의 계열 민족 혁명 운동을 이끌어가는 데 주력하자, 이에 보조를 같이하여 활동하였다. 이 밖에 1926년 창간된 국한문 잡지 『여자해방(女子解放)』의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1928년 현정건이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 상하이지부 사건으로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자, 현계옥은 1931년 7월 상하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현정건은 1932년 6월 출옥하였으나, 6개월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현계옥은 이에 크게 상심하여 외몽골로 갔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