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8월 8일 전라남도 대정군[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도에서 고석조(高錫祚)와 오영원(吳榮元)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호는 우인(又忍) · 우당(又堂)이다.
1910년 신성여학교, 1916년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여자잠업강습소 1년 과정을 졸업하였다. 1916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졸업 후 같은 학교에 부설된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같은 제주도 출신 사범과 동기생인 강평국(姜平國), 최정숙(崔貞淑) 등과 함께 탑골공원에 가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적색 댕기를 수천 매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벽보를 붙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해 3월 25일 경성여자고등학교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고, 4월 논산공립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9년 교사 재직 중에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吉岡]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1921년 도쿄[東京]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서 이덕요(李德耀), 이낙도(李樂道), 이의향(李義鄕) 등과 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일경에게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발하자 귀국하였으며, 1924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편입하였다. 1926년 3월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원 내과에 실습생으로 들어갔다. 그 뒤 경기도 개성에 있는 남성의원(南星醫院) 소아과에서 근무하다가 고향인 제주도로 귀향하였다.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김태민(金泰玟)과 결혼 후 조천(朝天)에 장춘의원(長春醫院)을 개업하였다. 제주여자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는데, 1928년에 사회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여자국민당 논산지구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1년 제주도로 돌아가 건국 운동, 사회운동에 앞장섰고, 제1대 도의원, 제3대 민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외 대한부인회 제주도지회장, 여성저축생활 제주지부장 등을 역임하고, 제주모자원과 홍익보육원, 선덕새마을어린이집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등 여성과 아동의 복지, 권리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1989년 8월 11일 제주도에서 사망하였다.
1978년 용신봉사상, 1980년 만덕봉사상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