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49년 2월 24일 서울시청에서 결성된 반관반민 통합 우익여성단체.
설립목적
연원 및 변천
결성 초기의 조직기구는 본부 구성에 총무부, 재정부, 조직부, 사업부, 외교부 5개 부서였으나 1958년에는 9개 부서로 확대되었다. 1949년 2월∼4월까지 전개된 지부건설 과정에서 지부기구는 본부기구를 따랐으며, 시의 검찰청장, 시장, 경찰국장, 경찰서장, 여자경찰서장을 고문으로 두었다. 이 단체는 매월 1회, 40여 명의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 회의와 부장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감사를 두었다. 본부 및 지부의 임원은 부녀국장, 부녀과장, 여성단체 회장이 겸임하였다. 대한부인회 회원은 대한민국 성인여성(16∼60세) 모두가 회원으로서, 회원가입과 회비납부는 의무였다. 재정은 정부의 지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사회단체 유지비 명목으로 일정액을 가구당 부과하여 세금을 거두었고, 그것을 대한부인회에 지원하였다.
1952년 10월 18일 부산에서 개최된 전국대회에서 제2대 회장에 박순천이 재임되었다. 1953년 10월 13일 전국이사회에서 종래 회장제도를 폐지하고 최고위원제를 채택하면서, 최고위원으로 박순천, 유각경, 박현숙(朴賢淑), 이예행(李禮行), 황애덕(黃愛德)이 선출되었다. 1953년 11월대한부인회 전국대회에서 박순천은 이승만이 지시한 대한부인회의 자유당 입당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박현숙, 유각경 등은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자유당 입당을 반대한 박순천 중심의 대한부인회는 이승만과 갈등하기 시작하면서 이승만은 다양한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이승만의 지원을 받아 대한부인회 활동을 재개하였고, 1953년박순천은 대한부인회를 사퇴하였다.
5․16 군사쿠데타로 건설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1961년 5월 22일 ‘국가재건회의 포고 제6호’를 발표하자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 해산이 이루어졌다. 이때 대한부인회는 해체되었고, 1963년 10월대한부인회는 대한여자청년단과 통합하여 한국부인회로 재건되었다.
기능과 역할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한국 여성운동 약사(1945∼1963)』(한국부인회총본부, 한밤의소리사, 1986)
- 「대한부인회 결성과 활동 연구(1948∼50)」(양동숙, 『한국학논총』34, 2010)
- 「초기 대한부인회(1949∼54)의 정치적 자율성」(송지윤,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여성정책 연구」(정현주,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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