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김해 허씨 일가와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퉁화현[通化縣] 여러 곳을 거쳐 류허헌[柳河縣] 우두거우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일원으로서 아비지와 친족들의 항일운동을 도왔으며, 1915년 국치일과 개천절에 국치가와 애국가를 부르며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의 탄압이 본격화하자, 1922년 다시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같은 해 이상룡의 손자인 이병화와 결혼하였고, 이후 판스현[繁峙縣], 수란현[舒蘭縣] 등을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결혼 후에는 이시영(李始榮), 이상룡, 김창환(金昌煥)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력하여 결성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활동을 지원하며 무장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그는 특히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의 · 식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음식을 준비하고 대원들이 입을 군복을 만들어 배급하였으며, 식비 마련을 위해 공장에서 일감을 가져와 부업을 하기도 하였다.
1932년 이상룡이 순국하자 귀국하여 주1의 종부(宗婦)로 안살림을 맡아 생활하였다. 1997년 5월 19일 90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1972년 자신의 생애를 담은 내방가사 「회상」을 집필하였고, 1995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일상에 관한 구술을 정리한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출간하였다.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