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독교면려청년회는 미국 기독교면려청년회의 신앙과 절제운동을 모범으로 삼아 1921년에 한국 장로교에서 조직되었고, 일찍부터 전 세계 기독교면려청년회와 국제적으로 교류하면서 한국 교회의 세계화(global sense)에 기여했다.
회원의 신앙훈련(성경공부와 기도), 회원 상호간의 교제, 하나님께 예배와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경건한 생활
기독청년면려운동(Christian Endeavor Movement)은 1881년 미국 포틀랜드(Portland)에 있는 윌리스톤 회중교회의 목사 클라크(Francis Edward Clark)가 청년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가지면서 촉발되었다. 2월 2일의 모임에서 기독청년신앙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미국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청년신앙운동은 회지「면려회」(1885)를 발간하여 신앙운동의 정신과 육성방법을 소개했다. 이 청년신앙운동단체는 1887년 유럽에 소개되었고, 1892년 중국에서 이 단체가 조직되었고 또한 일본의 고베와 동경에서도 조직되었다. 이렇게 국제적인 조직체가 된 이 청년신앙운동은 1927년 정식으로 “면려회”(Society of Christian Endeavor)로 불리었다. 일생동안 이 운동에 헌신한 클라크 목사는 역시 1927년 별세했다. 국제기독청년면려회(International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는 1931년에 ‘면려회창립50주년기념 희년대회’를 일본 동경에서 개최했다.
한국에서도 19세기 후반에 입국한 미국 선교사들이 면려회를 소개했으나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는데, 1921년 2월 경상북도 안동읍교회(현재 안동교회)에서 선교사 안대선(Wallis Anderson)의 발의로 면려회가 조직되었다. 안대선은 미국의 클라크 목사와 편지글을 주고받으며 면려회를 조직하는데 많은 도움을 입었다. 곧 바로 지역 교회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은 면려회는 그 해 6월 7-9일에 경상북도 북부지역연합회로 조직되었으며, 9월에 개최된 장로교 총회(제 10회)는 전국의 교회마다 면려회를 조직하도록 결의했다. 면려회 회원들은 실생(實生)회원 · 학습회원 · 명예회원 등으로 구분되었다. 실생회원이 되려면 나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세례교인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그의 삶을 본받아 살겠다고(實生) 서약해야 했다: “1.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봉행(奉行)하기로 힘쓸 것. 2. 내가 정한 뜻으로 매일 기도하기와 성경읽기를 끝까지 힘쓸 것. 3. 내가 있는 교회의 진흥하는 일에 힘써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의무를 지키기로 힘쓸 것. 4. 내가 본회의 일체 의무를 다 실행하되 매주일 본회 예배시간에 출석하여 찬송하며 기도하며 성경 읽고 증언하는 일분자(一分子)의 직책을 담임하기로 힘쓸 것. 5. 내가 매삭 헌심회(獻心會) 때에 혹 출타하야 돌아오지 못하였든지 또는 부득이한 사고로 참회치 못할 경우에는 호명할 때에 대답으로 성경말씀 외울 절수를 기록하야 본회 회원에게 편지로나 전편으로나 신실하게 송부하야 대신 외와 정신적으로 참석함을 표하기로 힘쓸 것.” 전국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려운동을 전개했다. 1924년 12월 2일에 서울 피어선신학교에서 ‘기독청연면려회조선연합회 창립총회’ 및 제 1회 면려 친선대회를 개최했다.
면려회는 1925년에 기관지 <진생(眞生)>을 발간하여 전국 교회에 보급하면서 문서신앙운동을 통해 청년들의 신앙의지를 다독였다. 1929년 9월에 개최된 장로교 총회(제 18회)는 매년 2월 첫 째 주일(창립주일)에 전국 교회가 면려주일로 지키도록 결의했다. 1930년 8월에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세계(국제)기독청년면려대회에 안대선과 조희염(曹喜炎) 목사가 -일제의 식민지배아래 국권이 상실되었음에도- 한국 교회의 대표로 참석했다. 1932년 9월에 개최된 장로교 총회(제 21회)는 면려부를 상설부서로 두기로 결의했다. 이때 면려회는 전국에 26개 지방연합회를 조직했고, 각 교회마다 면려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 수가 3만 명이 훨씬 넘었다. 기독청년면려운동은 복음전파운동과 생활절제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 대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 1938년 9월에 개최된 장로교 총회(제 27회)가 일제의 강압을 이기지 못해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9월 19일 면려회도 해체되었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면려회가 부활했다. 8월 19일 서울 피어선성경학교에서 ‘한국기독교동맹’이란 이름으로 면려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교회와 공산당 세력이 충돌하면서 새로 시작된 ‘기독청년대회’(1947.2.17., 평양 서문밖교회)가 정치투쟁으로 나아갈 조짐을 보였고, 공산당의 박해가 심해지자 남한으로 넘어간 회원이 많아졌고, 결국은 서울에 서북(西北)기독청년연합회(=면려회, CE(christian endeavor))가 발족되었다. 6·25전쟁 이후, 1952년 4월 대구 남산교회에서 개최된 제 3회 총회에서 북한(서북) 기독청년연합회는 남한의 연합회(기독교동맹)와 합쳐졌다. 1953년 4월에 개최된 제 4회 총회는 연합회의 명칭을 본래대로 환원하기로 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청년회 전국연합회’를 ‘기독청년면려회 전국연합회’로 바로 잡았다. 이와 함께 면려회는 세계 여러 나라의 면려회와 국제적인 교류도 회복했다.
1946년 3월에 교파를 초월한 기독청년대회가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장로교의 면려회(CE) · 감리교의 엡윗청년회 · 성결교의 성결청년회(성청)가 협력하여 교단을 넘은 연합청년신앙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47년에 서울 승동교회(장로교)에서 교파초월청년운동으로 발전하는 ‘한국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장로교가 전국 규모의 청년연합회를 조직하면서 교파초월청년연합운동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57년에 장로교 면려회는 총회의 허락을 얻어 연령에 따라 고등부 면려회(12-17세), 청년부 면려회(18-27세), 그리고 장년부 면려회(28-45세)로 조직이 정비되었다. 그런데, 1950년대에 장로교가 3 차례의 교단분열로 말미암아 4개의 교단으로 나뉘었고(고신, 기장(기독교장로회), 예장통합(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예장합동(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그 이후로 교단별 상황에 따라 면려회가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거나 쇠퇴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예장합동의 면려회는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고, 예장통합은 면려회가 정치사회적 관심을 높이며 사회봉사에 힘쓰다보니 교회 안에서 활동이 점차 약화되었다.
한국 교회(개신교)의 역사가 120여 년에 불과한데도 이 교회가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크게 부흥했는데, 이를 위하여 면려회가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