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공립협회(共立協會)가 추진하고 있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인 미주 한인의 민족주의교육 장려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8월 설립되었다. 발기인은 공립협회의 방화중·이순기·강영대·임정구·박춘식·정원현·조제근·임두화·한기갑·서예순 등 10명이며, 1908년 9월부터 학생을 모집하였다.
공립학교였기 때문에 학비는 무료였으며, 1년에 75원의 기숙비만 납부하였다. 학교 운영은 기숙사를 관장하는 총무 1인과 학사 운영을 처리하는 학감 1인이 맡았으며, 서기·회계·경찰을 두었다. 언어와 문자는 영어로 통일하였으며, 학생들은 상호 토론과 문답을 통해 덕성을 기르고 지식을 습득하였다. 또한 애국정신과 질서의식을 기르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 양성소는 공립협회가 국민회(國民會)와 그를 이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발전한 뒤에까지 북미지방총회에서 직접 관장하여 운영하였다. 1909년 8월 10관(款) 39개조의 ‘클래몬트학생양성소규칙’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가운데 설립 목적은 “재미청년 중에 뜻이 있는 자를 수용, 숙식을 공급하고 학업에 종사하게 하여 자유의 정신을 배양하고 애국사상을 고동(敲動)함에 있다.”고 명기하였다.
학생수가 증가하고 미주 한인의 성원에 힘입어 1914년 학교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고, 북미지방총회로부터 대한인중앙총회로 관할권이 넘어갔다. 중앙총회에서는 상당한 경비를 지급, 학교생활을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시설을 고치는 한편, 국한문 교수를 위한 교사를 초빙하였다. 이즈음 학생수는 기숙학생 17명, 등교학생 22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입학자격은 처음에는 15세 이상이었으나 이 시기에 들어 17세 이상으로 변경, 품행이 단정하고 전염병이 없는 자로 규정하였다. 이 때의 학교임원으로는 학생과 직원을 감독 지휘하고 학무부에 보고하는 감독, 국어교사, 재정출납과 예산편성을 담당하는 간사, 간사보좌의 협리 각 1인을 두었다.
또한, 교과과정에는 국어·한문·체육·음악 등이 포함되었으며, 전인교육이 강조되었다. 한편, 1910년 10월부터는 군사훈련반을 조직, 주당 3일씩 저녁에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1910년대 미주 한인사회에 충만해 있던 상무주의정신(尙武 主義精神)을 표방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