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목적은 초기엔 한중(韓中) 두 민족의 우의와 협력을 통한 항일전 수행을 목적으로 시작했으나, 제2차세계대전 발발 이후부터는 한길수(韓吉洙)에 대한 외교독립활동과 순회강연활동을 후원하는데 주력하였다.
중한민중동맹단이 설립된 배경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선전부 외교원으로 활동하던 한길수가 1933년 7월 김규식이 중한민중대동맹 미주파견 대표로 하와이를 방문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가입 및 후원을 요청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비롯하였다.
중한민중동맹단의 설립 시기는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였다. 김원용은 『재미한인오십년사』에서 1938년 12월 2일에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선주는 미육군정보국문서(MID) 2657-H-392철 제2문서와 1766-S-146철 안의 제5문서를 근거로 김규식의 하와이 방문 이후인 1935년에 중한민중동맹단 하와이지부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미육군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그는 1935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서류상의 것에 불과했고, 1938년에 들어와서 10명이 모여서야 비로소 정식 단체화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단의 보다 정확한 설립 시기는 「중한민중동맹단선전문」 제24호(1939년 9월 1일)에 1935년 2월 15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근거로 한길수가 상해의 중한민중동맹단 본부로부터 받은 위임장을 소개하였다.
그렇지만 1935년에 설립된 중한민중동맹단은 1937년 11월경에 비로소 그 이름이 미주한인사회에 처음 공개되고 있었음을 볼 때 설립 이후 실제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않은 명목상의 단체로 머문 것으로 보인다.
중한민중동맹단의 이름이 처음 신문지상에 공개되는 것은 『국민보(國民報)』 1937년 11월 10일자 「한길수씨대 일포시사」의 기사부터이다. 이 때부터 본단과 한길수에 대한 활동이 미주한인사회에 본격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중한민중동맹단의 조직구성은 1939년도의 경우, 단장 차신호(1940년에는 정두옥) 재무 정운서가 담당하고 있으나 그 이후는 확실치 않은 상태다. 한길수는 본단의 대표 자격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담당하였다.
중한민중동맹단은 기관지로 1939년경부터 『중한민중동맹단선전문』을 발행하여 본단의 활동을 대내외에 알렸다. 주요 활동은 동단의 대표인 한길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외국인등록법 시행시 일본인과 구별된 ‘한국인’으로의 등록운동을 비롯해서 미국 정부 요로에 일본의 대미침략설을 알려 미국의 대일군사활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원조를 장려하는 외교활동, 그리고 군수품의 대일수출을 적극 방해하는 활동과 순회 강연을 통한 대한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미일전쟁 발발후에는 적성국 재미일인(在美日人)들의 적대적인 반미활동 우려를 선전함으로써 미정부로 하여금 일인강제수용운동을 일으켜 이들 일본인의 활동을 제한시키기도 하였다.
중한민중동맹단은 1941년 4월에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가한 뒤 한길수가 국방봉사위원으로 활동하였지만 독자적인 행동과 이승만과의 충돌로 인한 한인사회의 내분조장을 이유로 1942년 2월 면직되자 연합위원회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중한민중동맹단은 임시정부로부터 정식 기관으로 인준을 받으려 했으나 ‘외교목표와 선전주지(宣傳主旨)가 득당(得當)치 못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하면서 이후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등의 신진단체들과 연계하여 반임시정부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 때 한길수는 중한민중대동맹 하와이지부 설립을 계획하여 김규식의 동의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본단을 조직하였다.
이름과 달리 중국인의 회원가입은 없이 한인들 중심이었고, 단원은 최소 40여 명에서 최대 200여 명까지 모였다. 단장은 처음에 정두옥이 맡았으나 그가 사면한 뒤부터는 한길수가 단장이 되어 동맹단을 이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