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이곳의 대표적인 산업인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삶을 일구어 갔다.
하와이는 무역선·고래잡이 어선들의 기항지이며 또 미국 선교사들의 첫 대외 선교활동지역이다. 하와이가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사탕수수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부터였다.
사탕수수는 하와이 각 섬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는데, 1802년 경 중국인이 사탕을 추출하였고, 1825년에는 서인도에서 사탕수주재배업에 종사하던 윌킨슨(John Wikinson)이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사탕수수농장을 설립한 이후에 대규모의 사탕수수 재배농장이 설립되었다.
하와이에서 사탕수수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만의 노동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19세기 중반부터 사탕수수농장주들과 하와이정부는 공동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이기 시작하였다.
1852년에 아시아인으로는 광둥(廣東) 출신 중국인 293명이 처음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였고, 그 후 하와이가 미국에 합병될 때까지 총 5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중국인들에게 의존하는 노동 독점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런 가운데 캘리포니아주(California州)에서 중국인을 반대하는 소요가 있은 후, 1882년에 ‘중국인이민금지법’(Chinese Exclusion Act)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하와이에서는 중국인을 대신할 가장 적절한 노동자로 일본인의 이민이 1885년에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은 1890년 초반 가장 큰 노동이민 집단이 되었으며, 1900년에는 61,111명(하와이 총인구 154,001명의 39.7%), 1910년에는 79,674명(하와이 총인구 191,909명의 41.5%)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일본인 노동자들도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농장을 떠나 다른 직종으로 옮겨갔고, 농장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동맹파업으로 대항하였다. 그래서 1890년과 1897년 사이에 일본인들은 29회나 파업을 일으켰고, 농장에서의 이탈율도 1895년에만 6%에 달하였다. 중국인에 이어 일본인 집단이 커지게 되자 이 역시 위협적 요인이 되면서 대체 노동력으로 한국인 노동자의 도입이 추진되었다.
하와이로 이주한 한국인 제1진이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은 1905년 8월 8일 몽골리아호까지 56회에 걸쳐 7,291명에 이르렀고,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전체 노동자 48,229명 가운데 한인은 4,683명으로 9.71%를 차지하였다.
대부분의 한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 재배를 담당하였고, 수송이 246명, 사탕공장의 불때기와 기계공이 19명, 기타가 17명이었다. 실제로 노동과정은 매우 고된 작업이었는데, 사탕수수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관개시설을 설치하고, 넓이 1m 정도의 고랑에 높이 18cm의 두렁을 세워 고랑 속에 40cm 간격으로 종묘를 심는다. 하루에 경작하는 넓이는 보통 7에이커(acre)였고, 1에이커마다 1톤의 비료를 뿌린다.
하와이 초기 이민 당시 하와이에는 65개의 농장이 있었고, 한인 노동자들은 각 농장에 분산 배치되어 하루 16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였으며, 백인 감독 하에 노예와 같은 대우를 참아가며 일을 해야만 했다.
사탕수수농장은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의 노동현장이며, 하와이의 한인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의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한푼 한푼 모은 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