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춘곡(春谷). 평안남도 용강 출신. 이조판서 임국로(林國老)의 아들이다.
1904년 미국에 건너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활동하며 기관지인 『공립신보(共立新報)』를 간행하였다. 하와이 교포들이 1903년에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하였다.
1907년 겨울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서 회계사무를 맡아 보았다. 190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일제가 애국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과 ‘105인사건’, 즉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모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일본 경찰에 잡혔다.
혹독한 고문 끝에 주모자 6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1912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7월 2심인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14년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진남포에서 광무소를 경영하며 광산 개발을 지도하였다.
1919년 이승훈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더불어 3·1운동을 계획, 준비하고, 평안도 일대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자신의 거주지인 진남포에서는 같은 감리교회 간부인 노윤길(盧允吉)·홍기황·김정민(金正民) 등과 만세시위를 준비하여 3월 1일 시위를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1923년 민족교육기관의 설립을 목표로 결성된 민립대학기성회의 감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