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희천군 북면 출신으로, 1879년(고종 16)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23년 9월 21일, 독립군 천마산대(天摩山隊)의 최오산(崔午山) 등 대원 17명이 평안북도 희천군 북면 명문동의 창참(倉站) 순사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불을 질러 전소시키고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천마산대 대원으로 의심되는 12명과 일반 주민 14명 등 모두 26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유승언(劉承彦)도 주민 협력자였다고 붙잡혀 가서 1923년 12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 후 평양복심법원에서 유승언 등 대부분의 피고는 최오산의 권유로 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을 조직하였다는 것, 경관의 동정을 정찰하고 밀고하였다는 것, 주재소 습격 때 접근로를 인도하고 같이 가서 도와주었다는 것 등의 피의(被疑) 사실은 모두 희천경찰서에서 당한 각종 악형과 고문에 못 이겨 한 거짓 자백임을 호소하였다.
변호사들도 갖가지 고문의 흔적과 깊은 상처를 증거로 내보이며 무죄를 주장하였고, 조선변호사협회에서도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다른 피고들과 마찬가지로 유승언의 항소는 기각되고 원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는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 1927년 11월 15일 형집행 정지로 가출옥하였다.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