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대 ()

근대사
단체
1920년평안북도 의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이칭
이칭
천마별영, 철마별영, 천마산대
정의
1920년평안북도 의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개설

최시흥(崔時興)·최지풍(崔志豊)·박응백(朴應伯)·최천주(崔天柱)·심용준(沈龍俊)·김세진(金世鎭)·양봉제(梁鳳濟) 등이 중심이 되어 1920년 3월경에 조직하였다.

일명 천마산대(天馬山隊)라고도 하는데, 근거지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의 천마산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천마별영(天摩別營)·철마별영(鐵馬別營)으로도 불렸다.

설립목적

목적은 군자금모금·민중공작·일본관리 암살에 두었다.

기능과 역할

대원은 약 500여 명으로 구한국 군인 출신이 많았고, 무기는 화승총(火繩銃) 등 재래식 병기가 중심이 되었다.

대장 최시흥의 탁월한 작전과 대원들의 용감성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희생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대원들이 투철한 항일의식으로 일신을 돌보지 않았던 점, 그리고 재래식 무기의 낙후성에 기인한다. 활동 지역은 평안북도 의주·구성·삭주·창성의 서부 산악과 광산 등이었다.

1920년 3월 선천군 태산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장 김병준과 서기 김은기를 사살하였다. 이날 의주경철서 형사 김명익의 집을 습격하여 사살하였다. 5월 9일에 철산군 여한면 사무소를 습격 방화하였다. 동월 의주군 고관면 서하동에 사는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동월 18일 의창군 신창면 세덕동에서 헌병보 1명을 사살하였다. 6월 4일 삭주군 구곡면 신안동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6월 6일에 강계군 문옥면 사무소를 습격하여 공금 700원을 탈취하였다. 동월 10일에 독립군의 행동을 밀고한 창성군 대창면장 강창헌(姜昌憲)을 암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삭주경찰서는 경계수사대(警戒搜査隊)를 조직하였다.

삭주군 수풍면과 덕유동에서 활동하던 공작대는 그 달 19일 경계수사대 제1분대와 교전하였고, 21일에는 안풍동에서도 교전하였다. 28일에는 천마대원 28명이 제2분대와 약 40분간 전투를 벌여 부관(副官) 허기호(許基浩) 이하 5명이 희생되었다.

일제의 공격도 가열되어 30일에는 제3소대장 한성호(韓成浩)와 김옥선(金玉善) 등이 의주 경찰서 사사코[笹子] 경부보(警部補) 등에게 고령삭면 천마산에서 붙잡혔고, 8월 12일 40여 명의 대원이 사사코 경부보와 대치하다가 불가항력으로 퇴각하였다.

그 달 18일서삼면 원풍동에서 원풍주재소 순사부장 가와바라[川原英二]를 사살하고, 후지하라[藤原]에게 부상을 입혔다. 12월 8일에도 공작을 마치고 귀대하던 대원들이 사사코 경부보와 교전하였다. 1921년 1월에는 천마대를 추적하는 수사대가 증강되어 고령삭면과 천마산 등지에서 계속 적과 교전하였다.

9월 15일 고성천안(古城川岸)에서 전개된 평안북도 북진 경찰서 수사대와의 전투에서는 다카무라[高村貞三郎] 등 수 명을 사살하였다. 한편, 천마대는 남만(南滿)의 민국독립단 등 각 독립단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암살·방화·독립선언·군자금모금 등을 하였다.

뒤에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남만으로 이동, 관전(寬甸)·집안(集安)에 근거를 두고 국내에 침투하였다.

대장 최시흥은 광복군총영과 직접 연락을 취하거나, 최지풍 등을 보내 무기와 지령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광복군총영의 별동대라는 의미로 천마별영이라 부기도 하였다.

이후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자 의용군 제3중대로 편제되었다. 일제가 현상금 5,000원을 걸었던 최시흥이 1922년 겨울 중국관헌에게 피체되자 최지풍이 중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통의부와 의군부의 대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1ㆍ2ㆍ3ㆍ5중대가 참의부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천마산대는 광복군총영, 대한통의부, 참의부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광복군총영

참고문헌

「朝鮮軍參謀部報告文」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동아일보』
집필자
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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