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자 유인식(柳寅植)은 1903년 고종이 영남 여러 서원에 학교를 세우라는 윤음(綸音:임금의 말씀)을 내리자 동지 김진수(金進洙) 등과 함께 근대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보수 유림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1907년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의 재산을 기금으로 김병후(金秉厚)·하중환(河中煥)·김동삼(金東三) 등과 상의하여 학교설립 기성회를 조직,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교장에 김병식(金秉植), 학감에 유창식(柳昌植)이 취임하고 유인식은 자청하여 교무주임을 맡았으며, 교사는 주로 한성사범학교 출신의 신진 청년들을 초빙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나 신식교육에 대한 유림의 완고한 반대와 증오가 갈수록 심하여 유인식은 유림당회(儒林堂會)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성리학에서 교리와 사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을 일컬음)으로 지목되고 스승의 문하에서 파문을 당하였다.
당시 협동학교 외에 같은 식으로 설립된 서원학교 중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보문의숙(寶文義塾)이 있었으나 곧 폐교되었다. 같은 무렵에 세워진 동화학교(東華學校) 등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였다.
1909년에는 일본군의 흉계로 학교에 수십 발의 포탄이 발포되어 교사 김기수(金基洙)와 학생 2명이 피살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인식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 발전에 더욱 매진하고 교사들의 열성과 청년학도들의 의지는 드높아져 교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1912년 당시 2학년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과목을 참고로 살펴보면, 수신·국어·역사·지지(地誌)·외지(外地)·한문·작문·미술·대수·물리·화학·생리·동물·식물·박물(博物)·창가·체조 등이었다.
국권 상실 후 계속된 일제의 강력한 행정적 탄압과 재정적 궁핍 등으로 더 이상 협동학교를 유지하지 못하자 유인식은 만주로 학교를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탄로나 유인식 등이 구속되면서 설립 10년 만인 1917년에 협동학교는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