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준 ()

유성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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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농상공부 회계국장, 충청북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긍재(兢齋)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0년(철종 11) 10월 21일
사망 연도
1934년 2월 27일
본관
기계(杞溪)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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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유성준은 일제강점기 농상공부 회계국장, 충청북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60년(철종 11)에 태어나 1934년에 사망했다. 1883년 정부 유학생으로 일본 게이오의숙에 입학했다가 수신사와 함께 귀국하였다. 1896년 국사범 혐의로 일본에 망명하여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였는데 유길준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유배 중에 기독교에 입교했다. 일제강점기에 충청북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충청남도지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법학통론』(1905)과 국한문 『신약전서』(1916)가 있다.

정의
일제강점기 농상공부 회계국장, 충청북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60년 10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긍재(兢齋)이다. 아버지는 유진수(兪鎭壽), 형은 유길준(兪吉濬), 딸은 유각경(兪珏卿)이다. 조선 말기에 내무아문 주임주사, 농상공부 회계국장 등을 지냈고, 대한제국기에는 통진군수, 내부협판, 내각법제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충청북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충청남도지사 등을 지냈다. 1934년 2월 27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가정에서 수학하다가 1883년 10월 정부 유학생으로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 재학 중 요코하마세관에서 사무를 익혔다. 정부 명령으로 수신사 서상우(徐相雨)를 따라 1885년 1월 귀국했다. 1885년 5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 6월 내무부 부주사(副主事)가 되었다. 1887년 6월에는 국서이정위원(國書釐整委員)으로 일본에 갔다가 8월에 귀국해서 9월에 내무부 주사로 승진했다.

1891년 10월 전운서(轉運署) 사무관으로 기선(汽船) 창룡호(蒼龍號)의 삼남지방 세미(稅米) 조운(漕運) 일을 관장했다. 1894년 7월 내무아문 주임주사, 8월 탁지아문 주임주사, 12월 인천 이운사(利運社) 사무를 관장했다. 1895년 4월 농상공부 회계국장으로 전임되었고, 5월 정부의 견습수세사무(見習收稅事務)에 발탁되어 탁지부 파원(派員)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1월에 귀국했다. 정부에서 한인으로 해관장(海關長)을 삼기 위해 일본 요코하마항에서 관세업무를 익히게 보낸 것이었으나 1896년 4월 국사범 혐의를 받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 3월에 도쿄부기전문학교에 입학하여 8월에 졸업하였고, 이어 사이타마현의 순사교습소(巡査敎習所)에서 순사교습사무를 견습하였다. 1898년 1월에는 도쿄에 있는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하여 1899년 1월까지 1년간 법학을 공부하였다. 망명 당시 재정과 조세 사무의 일인자로 평가받아 정부의 명을 받고 1899년 9월에 귀국했다.

1902년 3월 이른바 ‘유길준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국사범으로 경위원(警衛院)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수감 중 기독교에 포교되었다. 1904년 2월 황주군 철도(鐵島)로 3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3월에 1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1905년 5월 유배형에서 해제되었는데, 유배 중이던 1904년 5월 황주읍 교회에서 정식으로 기독교에 입교했고 1905년 6월 서울에 돌아온 후 연동교회(蓮洞敎會)에서 세례를 받았다. 1905년 12월 경기관찰부 통진군수, 1906년 1월 내부 경무국장, 4월 지방조사위원, 8월 내부 지방국장 겸 치도국장(治道局長)으로 선임되었고, 12월에는 학부 학무국장이 되어 지방관전고(地方官銓考) 위원과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을 겸임하였다.

1907년 5월 내부협판과 임시서리 경무사 사무를 맡으면서 관제조사위원(官制調査委員)을 겸하였다. 8월 내각법제국장으로 전임되면서 9월 문관전고소 위원장과 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 위원, 11월 임시황실어용급위호사무정리(臨時皇室御用及衛護事務整理) 위원을 겸했다. 황실 재산을 조사한 공으로 12월 상여금 250원과 위로금 160원을 받았으며, 같은 달 보성전문학교 제2대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1908년 1월 사임했다.

1908년 1월 법전조사국 위원, 기호흥학회 평의원, 10월 기호흥학회 부회장, 1909년 2월 기호학교 교장, 4월 대한농회 의원을 역임했다. 같은 해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을 애도하는 관민추도회 제문 담임위원을 맡았다.

병합 후 1910년 10월 충청북도 참여관에 선임되었고,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충청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겸직하며 조선총독부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3월 경기도 참여관으로 전임되어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겸했다. 1921년 2월부터 1923년 2월까지 문관분한령(文官分限令)에 따라 2년간 휴직했다.

휴직 중이던 1921년 4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1926년 8월까지 재임하며 매년 1,500∼2,000원의 수당을 받았고, 중추원 참의로 구관급제도조사위원회(舊慣及制度調査委員會) 위원을 겸했다. 1921년 6월 신가정사(新家庭社) 사장에 취임했고, 1922년 11월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 2월 기독교 창문사 취체역, 4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이 피해를 입자 피해를 입은 도쿄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救濟會]를 조직했다. 1924년 8월 조선여자강습원 후원회 조직에 참여했고, 12월 분규 중이던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1925년 7월까지 재임했다.

1926년 8월 충청남도지사에 임명되면서 중추원 참의를 사임했고, 10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7년 5월 강원도지사로 자리를 옮겼고, 1928년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29년 12월 중추원 참의로 재임명되어 1934년 2월 타계할 때까지 매년 2,5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 1931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법학통론』(1905)과 국한문 『신약전서』(1916)가 있다.

유성준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66∼58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주한일본공사관기록』13(국사편찬위원회, 1995)
『한국의 법률가상』(최종고, 길안사, 1995)
『고려대학교칠십년지』(고려대학교, 1975)
『연동교회사』(연동교회, 1975)
「개화기의 한국법문화」(최종고, 『한국학보』24, 198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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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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