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

김규동
김규동
현대문학
인물
해방 이후 『나비와 광장』 · 『죽음 속의 영웅』 · 『느릅나무에게』 등을 저술한 시인.
이칭
이칭
문곡(文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5년 2월 13일
사망 연도
2011년 9월 28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
관련 사건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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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규동은 해방 이후 『나비와 광장』, 『죽음 속의 영웅』, 『느릅나무에게』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48년 평양종합대학교를 중퇴하고 월남했다. 1951년 후반기 동인을 결성했다. 그는 후반기 동인으로 생명파와 청록파의 순수서정성을 비판했다. 1959년 『새로운 시론』에서 시에는 현실 반영과 비판, 역사의식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70년대에는 민중시를 창작하면서 분단문제를 극복하려는 희망과 의지를 시에 담았다. 1980년대에는 정치적 부조리를 정면으로 언급하며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문학운동에 동참하였다.

정의
해방 이후 『나비와 광장』 · 『죽음 속의 영웅』 · 『느릅나무에게』 등을 저술한 시인.
생애 및 활동사항

호는 문곡(文谷)이다. 1925년 2월 13일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하여 1944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연변의과대학을 수료하였다. 1948년 평양종합대학교를 중퇴하고 월남하였다.

1948년 『예술조선』에 「강」을 발표하였으며,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는 살리라」가 당선되었고, 같은 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포대가 있는 풍경」이 당선되었다. 첫 시집 『나비와 광장』(1955), 『진공회담』, 『밤의 신화』에서는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을 다루지만 새로운 문학적 도전과 실험을 시도한다. 이들 시집에는 외국의 문학이론, 특히 초현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체파 운동 등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전망 없는 사회에 대한 고민과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박인환, 조향, 김경린, 이봉래, 김차영 등과 ‘후반기’ 동인을 결성, 당시 생명파청록파의 순수서정성을 비판하면서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현실 속에서 인간존재의 황폐함과 현대문명의 한계를 중심 주제로 다루었다. 1959년 『새로운 시론』으로 후반기 동인 중 유일하게 시론을 발표한 시인은 시에는 현실 반영과 비판 그리고 역사의식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시인이 홀로 현대문명의 소음을 피하여 화조풍월의 고향 산천을 찾아 영구히 하향(下鄕)해서는 아니된다. 한 시대의 예술정신이란 그 시대의 가장 강렬하고 대표적인 저항정신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후반기 회원들은 청년의 기개로 전통을 반대하며 도시적 취향으로 과감하게 언어를 두고 실험정신을 발휘하였으나, 시선집 『깨끗한 희망』(1985)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50년대 모더니즘 문학운동이 민족 현실을 절실하게 노래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다. 50년대 시에서는 전쟁을 체험한 세대답게 문명에 대한 깊은 반성과 실험을 담은 치열한 문학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전쟁과 분단으로 일어난 사회 · 역사 문제를 문학 담론으로 해석해본 결과이다. 이후 야만스러운 문명의 그늘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발견하여 문학세계를 넓혀나갔다.

언론계와 출판계에서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당시 문단상황에 상처를 받고 1962년부터 10년에 걸쳐 절필을 하였다. 1974년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민족문학 진영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공백기를 끝냈다. 민족분단 문제, 사회노동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문학의 현실참여를 실천하였다. 이후 『죽음 속의 영웅』(1977)을 발표하면서 긴 침묵의 시간을 걷어냈다. 시집 자서에서 “비탄에 젖은 절망의 노래가 어찌 사회와 민중의 내일을 위하여 빛이 될 수 있었을까 보냐.”라고 하면서 시창작이란 것이 개인의 정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운동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1970년대 군부독재와 산업화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현실비판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주로 민중시를 창작하면서 분단문제를 극복하려는 희망과 의지를 시에 담았다. 1980년대 들어 발표한 시는 독재권력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정치적 부조리를 정면으로 언급하며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문학운동에 동참하였다.

팔순을 맞아 2005년에 출간한 『느릅나무에게』에 수록된 83편의 시는 그동안 쓴 3백여 편에서 고른 것이다. 시인은 일생을 시에 의지하며 살아왔지만 ‘인격과 품성의 잘못은 나에게 있지만 다른 한편 절반의 책임은 분단에 있다.’고 썼다. 이에는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변화의 의지와 집념을 청년 못지않게 간직한 시인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시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켜내다가 2011년 9월 28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고문과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59년 자유문인협회상을 시작으로 하여 1996년 은관문화훈장, 2006년 만해문학상, 201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김규동 시의 변모과정 연구」(류병곤,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분열과 부정’에서 ‘통일염원’에 이르는 도정: 김규동론」(한강희, 『현대문학이론연구』 2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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