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74년 11월 18일 고은, 신경림, 백낙청, 염무웅, 조태일, 이문구, 황석영, 박태순 등이 광화문 사거리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내용의 ‘문학인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함으로써 결성되었다.
1969년 3선 개헌 이후 문학계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이 활발해져 갔다. 그 상징적 사건이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이었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발표된 장시 「오적」은 김지하, 부완혁, 김승균 등의 구속으로 이어졌고, 문학계의 석방운동은 지식인, 재야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문학계의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는 와중에 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문학계의 민주화 운동은 곧 반유신 투쟁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유신체제 성립 이후 문학계의 반유신 운동의 본격화를 알린 것은 1973년 12월 24일 백기완이 주도하던 백범사상연구소 주최의 ‘민족문학의 밤’이었다. 이로부터 ‘100만인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개시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 1월 7일에는 ‘문인 61인 개헌지지 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이 성명서의 발표로 61인 전원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이 사건은 소위 ‘문인 간첩단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고은이 총책임을 맡고 이문구, 염무웅, 박태순 등이 주도해 1974년 11월 18일 ‘문학인 101인 선언문’이 발표되었고 가두시위를 통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이 공식화 되었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고은을 대표 간사로 하고 신경림, 염무웅, 황석영, 조해일, 박태순이 간사를 맡았으며 고문으로 김광섭, 이헌구, 이희승, 김정한, 박두진 등을 추대했다.
문학인 선언을 준비하던 문인들은 개별적 저항의 한계를 절감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저항행동을 담보하기 위한 조직체 건설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문학인 101인 선언문’의 내용은 부정부패와 왜곡된 근대화에 따라 민중들의 생존이 위협당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사상의 자유 보장, 서민 대중 생존권 보장 및 노동법의 민주적 개정, 자유 민주주의에 따른 헌법 개정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조직 결성 이후 반유신 운동을 위해 다양한 연대활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활발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곧 유신체제의 직간접적인 탄압을 불러오게 했다. 김병걸(경기공업전문학교)은 사직 압력으로 사표를 내고 말았고, 백낙청(서울대학교 문리대)은 사직을 거부하자 파면당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장백일, 김우종, 임헌영, 정을병 등도 사직을 당했다.
1974년 12월 16일에는 국제 펜(PEN) 한국본부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김지하 석방, 김병걸·백낙청에 대한 부당 조치 철회, 장백일·김우종·임헌영·정을병 회원의 복직 등을 주장했다. 특히 1975년 들어 김지하 석방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이슈가 되어 문학계는 물론 종교계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0년대 들어서도 활발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고,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면서 해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