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 출생. 호는 야인(野人)
1920년경부터 활발하게 시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하나 그의 전기적 생애와 문단활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920년대 시집 『열과광(熱과光)』을 발간했다고 하나 당시 『조선일보』(1926.12.5)에 출판불허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김해강의 기록에 따르면 김창술과 2인 시집을 출간하는 일조차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의 시집 출판은 정치적인 이유로 거부당했고, 개인이 부담하는 자비출판 시집도 출간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그의 문학적 전기적 사실을 확인할 길이 미미하다.
김창술의 시는 김성윤이 펴낸 『카프시전집1』(시대평론, 1988)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최명표가 찾아낸 작품을 모두 합치면 시 49편, 역시 2편, 산문 3편이다. 초기시는 주제의식이 선명하지 못했는데 첫 시 「반항(反抗)」(『동아일보』1923.8.26)이후, 유엽의 호의로 『금성』(1924.5)에 발표한 「모정(茅亭)에서」, 「수포(水泡)」(『조선일보』1925.2.23), 「실제(失題)」(『조선일보』1925.6.17)는 낭만주의 문학경향과 개인의 주관적인 관념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맑스주의의 반외세 민족해방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의 시는 개인서정에 머물지 않고 현실과의 갈등을 극복하면서 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의 문학세계는 「여명(黎明)의 설움」(『조선일보』1924.11.3), 「아-지금은 첫겨울」(『조선일보』,1925.3.23), 「촛불」(『개벽』1925.7) 「성숙기(成熟期)의 마음」(『조선일보』1925.3.9), 「하일적화영사막(夏日赤華映寫幕)2」(『조선일보』1927.6.7), 「병아리의 꿈」(『조선문단』1926.4), 「대도행(大道行)」(『개벽』1925.2), 「긴밤이 새여지다」(『개벽』1925.7) 등에서 잘 나타난다.
모순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투쟁의지를 고취한 작품으로는 「문열어라」(『조선일보』1925.6.8), 「훈풍(薰風)에 날리는 오월의 긔폭」(『대조』1930.7), 「앗을대로앗으라」(『음악과시』1930.8) 등의 작품을 통해 식민지의 모순극복을 시도하였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전쟁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위악적인 구조로 변했고 「전개(展開)」(『조선일보』1927.8.12), 「가신뒤」(『조선강단』1929.12) 등 그의 혁명을 위한 시작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는 1945년 12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기관지 『예술운동』에 동맹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에 참가요청을 받은 사실도 있다. 그러나 출석자명단에 이름이 없으며 그후 생애와 사망연대도 정확하지 않다.
해방이후 분단이 되면서 그의 문학은 북한문학사에서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다. 류만은 『조선문학사9』에서 김창술을 프롤레타리아 시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언급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1920∼30년대 경향시의 변모과정과 일치하는 시인으로 평가하며 또한 계급의식을 적극적으로 담아낸 정치시를 쓴 시인으로 평가한다. 노동자시인으로서 김창술은 개인이 처한 가난을 사회현실과 연결시켜 개인의 삶에 역사의 흐름을 반영한 리얼리즘시인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