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은 해방 이후 「여명도」, 「길」, 「초토의 시」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42년에서 1945년까지 함흥의 북선 매일신문사 기자로 활동했다. 1946년 펴낸 시집 『응향』으로 필화사건을 겪고 월남을 선택했다. 한국전쟁기에는 대북심리전 요원으로 『북한특보』, 『봉화』, 『승리』 등에 참여하면서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작품 중심에 놓여 있으며 자기 고백과 성찰이 주요한 특징을 이룬다. 한국 전쟁문학에서 구상의 작품은 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전쟁문학이 왜 반전문학으로 가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본명 구상준(具常浚). 서울 종로구 이화동 642번지 출생.
본적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9번지이나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출생했다. 1923년 아버지의 교육사업을 위해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리(원산시 근교)로 이주를 했다. 1938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했고, 1941년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함흥의 북선 매일신문사 기자로 활동했으며, 1946년 원산 문학가동맹이 펴낸 해방기념시집 『응향』에 실은 「여명도」, 「길」, 「밤」 등 세 편의 작품이 필화를 겪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언론매체를 활용하여 구상 시를 규탄하는 내용을 실었고, 원산과 각 지방의 문학가동맹으로 검열이 확대되었다. 구상의 시는 백인준에 의해 예술지상주의적, 퇴폐주의적, 악마주의적, 부르주아적, 반인민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7년 2월 원산을 탈출하여 월남하였다. 『응향』 사건이 남쪽 문학가동맹 기관지에서 다뤄지자 당시 민족진영의 김동리, 조연현, 곽종원, 임긍재 등이 반론을 주장했다.
구상 시인은 『해동공론』(최태응 편집)에 「북조선 문학 여담」으로 필화사건을 발표했고, 『백민』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49년 육군정보국의 『북한특보』 편집책임을 맡았으며, 북한으로 비밀리에 보내는 「봉화」를 제작, 1950년 한국전쟁 때 정훈국으로 옮겨와 국내외 상황과 전투의 전과를 알리는 인쇄물 『승리』(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의 전신)를 제작하였다.
1952년 『승리일보』가 폐간되면서 영남일보사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어 반공전쟁을 옹호하고 독재를 반대하는 논설을 펴 부산에서 압수당하는 사건도 몇 차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내용이 담긴 사회평론집 『민주고발』은 판매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반공법 위반으로 15년이 구형되었으나 무죄를 인정받았지만 6개월간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구상시인은 정치참여의 기회를 모조리 물리친다.
1952년부터 1999년까지 효성여대, 서울대, 서강대, 하와이대, 카톨릭대, 중앙대 등에서 교수생활을 했으며 1959년 조작된 간첩사건에 연루된 이후 정치와 거리를 둔 구상시인은 문학창작과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사 상임고문시절, 최석채 주필의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글의 정정과 필자해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치깡패를 동원해 인쇄기를 파손한 사건이 일어난다. 구상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민주적인 정치를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작품 중심에 놓여 있으며 자기고백과 성찰이 주요한 특징을 이룬다. 역사적 격변기를 살았던 구상의 문학활동은 한국전쟁의 갈등과 이데올로기의 선택문제에 노출되어 있었다. 시집 『응향』으로 필화사건을 겪고 월남을 선택했던 구상 시인은 한국전쟁기에는 대북심리전 요원으로 활동, 『북한특보』, 『봉화』, 『승리』 등의 인쇄물 제작에 참여하면서 종군작가로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문학에서 구상의 작품은 전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전쟁문학이 왜 반전문학으로 가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1955년 금성화랑 무공훈장, 1957년 서울시 문화상,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4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