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매일신보』에 기자로 입사했다가, 1920년 8월 『동아일보』로 이직하여 사회부장, 같은 해 시 「이향(離鄕)」을 발표했다.
1922년 『개벽』에 휘트먼(W. Whitman)을 소개했고, 그 영향을 받아서 시「아 지금은 새벽 네시」(『개벽』 1924년 11월호)를 발표한 이후, 『개벽(開闢)』과 『별건곤(別乾坤)』 등에 다수의 시를 발표했다.
1923년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했으며, 문학단체 파스큘라(PASkYULA) 결성에 가담했다. 이후 파스큘라가 염군사(焰群社)와 결합, 카프(KAPF)가 되었을 때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반항적인 성격의 시 「분순의 피」를 썼다.
1924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개혁운동이 실패하자 『조선일보(朝鮮日報)』로 이직하여 사회부장·지방부장 등을 거쳤지만, 1925년 '조선일보 필화사건'으로 1926년 3개월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중외일보(中外日報)』의 사회부장·편집부장,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조선일보』 편집국차장·국장 등을로 근무했다.
1938년 4월부터 1940년까지 『매일신보(每日新報)』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1939년 7월 매일신보사에서 중일전쟁 2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성전(聖戰) 2주년 좌담회(6회)'에 매일신보사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했고, 그해 7월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평의원이 되었다. 1941년 9월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해방 이후 1945년 12월 복간된 『조선일보』을 비롯하여 『서울신문』·『대동신문(大東新聞)』 등에서 전무·부사장으로 재직했다. 1946년 이범석(李範奭)의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의 부단장으로 활동했고, 1948년 부터 공보처 차장으로 재직하던 중 '서울신문 반정부이적행위 사건'과 관련, 1949년 퇴임했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고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