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는 일제강점기 「밀실로 돌아가다」, 「만가」, 「오뇌의 청춘」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소설가, 비평가이다. 호는 월탄이다. 문학동인지 『문우』를 발간하면서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1921년 『장미촌』 창간호에 「오뇌의 청춘」과 「우유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에 발을 내디뎠다. 1930년대 「금삼의 피」(1936)와 「대춘부」(1937)를 저술하면서 역사소설로 전환했다. 박종화는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하여 1930년대 역사소설을 통해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호는 월탄(月灘), 이 밖에도 죵화 · 춘풍(春風) · 조수루주인(棗樹樓主人, 釣水樓主人)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서울 출생. 소년시절 사숙(私塾)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였다.
1947년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서 1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韓國文學家協會)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 제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제1회 5 · 16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하여 같은 해 10월 제1회 월탄문학상을 시상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하면서 문학 수업을 시작하였고, 1921년 『장미촌(薔薇村)』 창간호에 처녀작 「오뇌(懊惱)의 청춘」과 「우유(牛乳)빛 거리」의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에 발을 내디뎠다.
다음해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창간호에 「밀실(密室)로 돌아가다」와 「만가(挽歌)」의 두 편의 시와 「영원(永遠)의 승방몽(僧房夢)」이라는 수필을 발표하였다.
이어 「오호 아문단(嗚呼我文壇)」이라는 평론과 「목매이는 여자」라는 처녀 단편, 시 「흑방비곡(黑房悲曲)」과 「사(死)의 예찬(禮讚)」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24년에는 조선도서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에서 처녀시집 『흑방비곡』을 출간하였다.
단편 「순대국」 · 「아버지와 아들」(1924) · 「여명(黎明)」 · 「부세(浮世)」(1925) 등을 쓰면서 소설가로 전신함으로써 좌절로 끝난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현실 부정 의식의 출구를 열게 되는 역사소설가로서 기반을 닦았다.
문단시평이나 문단회고담을 계속 발표하였으며 「대전이후(大戰以後)의 문예운동(文藝運動)」이라는 문제의 비평을 쓰기도 하였으나 당시 비평계의 논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금삼(錦衫)의 피」(1936)와 「대춘부(待春賦)」(1937)로부터 역사소설로 전환하였으며, 단편 「아랑의 정조(貞操)」 · 「전야(前夜)」(1940) 등과 장편 「다정불심(多情佛心)」(1940)을 잇달아 발표하여 역사소설 작가로서 재량을 인정받았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발간하였다.
광복 뒤의 감격과 흥분 속에서 쓰여진 「민족(民族)」(1945)은 앞선 「여명」 · 「전야」와 함께 삼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고, 「홍경래(洪景來)」(1946)와 「청춘승리(靑春勝利)」(1947) 및 단편 「논개(論介)」를 통해서도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였다. 1954년 서울신문사 사장을 사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란과 공무로 잠시 중단되었던 창작 생활을 다시 계속하였다.
「임진왜란」을 『조선일보』에 전 946회 연재하였고, 단편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1955)과 장편 「벼슬길」(1958) · 「여인천하(女人天下)」(1959) 등을 거의 같은 무렵에 연재하여 인기를 모았다. 1961년에 회갑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하였다. 다음해 『조선일보』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부산일보』에 「제왕삼대(帝王三代)」를 각각 연재하였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 뒤 수상록 『달과 구름과 사상(思想)』을 출간하였다. 1965년 「아름다운 이 조국(祖國)」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였다. 칠순을 맞는 1970년 제3수필평론집에 해당되는 『한자락 세월(歲月)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 『영원(永遠)히 깃을 치는 산(山)』을 내놓았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장장 8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신문소설 사상 2,456회라는 최장기록을 남겼다. 그 뒤 발표한 수상록 『화음 · 격음(和音 · 激音)』과 회고록 『역사(歷史)는 흐르는데 청산(靑山)은 말이 없네』 등은 그의 문학적 생애를 증언하여준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시대고인 고독과 절망, 좌절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1930년대의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설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이나 민족혼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