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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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방송
문헌
한국일보사에서 『태양신문』을 개제하여 195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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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국일보》는 한국일보사에서 《태양신문》을 개제하여 1954년에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태양신문》을 인수한 장기영이 제호를 바꿔 창간하였다. 창간 당시 신문의 사시는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였다. 1957년에는 ‘대한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국을 개설하였다. 1961년부터 연차적으로 ‘10만어린이부모찾아주기캠페인’을 벌였다. 1964년부터 6년간에 걸쳐 추진한 학술조사를 통해 문무대왕해중릉을 발견하였다. 창간 이후 증면을 계속하여 2003년 3월 3일에 56면으로 증면하였다.

정의
한국일보사에서 『태양신문』을 개제하여 1954년에 창간한 신문. 일간신문.
개설

한국일보는 『태양신문(太陽新聞)』을 인수, 운영하던 장기영(張基榮)이 1954년 6월 9일 제호를 바꿔 창간한 신문으로 지령은 『태양신문』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임원진은 발행 · 편집 겸 인쇄인에 장기영, 주필에 오종식(吳宗植), 편집국장에 전홍진(全弘鎭) 등이었다. 사옥은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7번지에 있다.

편찬/발간 경위

창간 당시의 이 신문의 사시는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였고, 그 뒤 창간 당시의 사시를 더욱 구체화시켜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자세’로 바꾸었다. 창간호는 17단제로서 1일 2면을 발행하였으나, 1955년 4월부터는 1일 4면을, 1956년 신년호부터는 1일 12면을 발행하였다.

1957년 4월 4일에는 ‘대한방송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국을 개설하였다. 이 방송은 전광(電光) 뉴스 및 전국중고교축구대회 실황중계 등을 함으로써 한국 텔레비전 방송의 효시가 되었다. 1958년 9월 26일에는 창간동인이었던 최병우(崔秉宇)가 대만해협(臺灣海峽)에 특파취재중 실종, 순직하였다. 1958년 11월부터는 석간 2면을 증간하여 조석간 6면으로, 1959년 1월부터는 매일 조석간 8면(주 56면)으로 증간, 발행하였다.

1961년부터 연차적으로 시작한 ‘10만어린이부모찾아주기운동’은 총 514건의 상봉을 실현시켜 전후 최초로 이산의 고통을 덜어 준 국민적 사업이 되었다. 1962년 11월 28일자에 군사 정권의 공화당(共和黨) 창당에 대하여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하여 장기영 사장을 비롯, 홍유선(洪惟善) 편집국장, 김자환(金子煥) 정치부장 등 3인이 구속되고 3일간 근신 휴간을 당하였다. 그 뒤에 세 사람은 무혐의 불기소로 구속이 해제되었다.

1964년부터 6년 간에 걸쳐 추진한 ‘신라오악학술조사(新羅五嶽學術調査)’와 ‘신라삼산학술조사(新羅三山學術調査)’를 통하여 고고학적 업적인 문무대왕해중릉(文武大王海中陵)을 발견하였다. 1974년 1월부터 창간 20주년 기념사업으로 ‘1천만 이산가족친지를 서로 찾자’는 운동을 시작해 1976년 7월까지 162명의 부모 · 형제 · 친지를 서로 만나게 하였다. 1975년 7월 말 국내 최초로 4색 동시 분해가 가능한 최신 윤전기를 도입, 1976년 신년호를 컬러판으로 인쇄하였다.

1976년부터는 국내 언론계 최초로 기자들에 대한 해외연수제를 실시하였다. 1977년 대한산악연맹과 공동주관으로 추진해 오던 ‘77에베레스트등정계획’이 성공하여 그 해 9월 15일 고상돈(高相敦)이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하였다. 1979년부터는 서울특별시와 공동으로 한강변에 푸른 나무 심기운동을 연차사업으로 전개하여 1차 연도인 1979년 100만 그루의 나무를 한강변에 심었다. 1979년 10월 9일 국내 최초로 한글자동문선(自動文選) 및 자동식자(自動植字) 컴퓨터시스템을 완성시켰다.

1981년 10월 1일 ‘문화센터’를 발족하여 생활교양 · 어학 · 취미 등 다양한 문화강좌를 개설, 운영하였다. 1983년 4월 19일부터는 신문의 가독성(可讀性)을 높이기 위하여 본문활자를 19% 늘려서 읽기 편한 신문으로 활자개혁을 단행하였다. 1984년 4월 HK8304라고 명명된 입력장치를 개발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한글 · 한자 신문편집기계가 완성되어 본격적인 CTS(Cold Type System)를 갖추었다. 1985년 1월 국내신문 최초로 인공위성을 통한 전자뉴스 수신체제를 갖추었다.

1986년 6월 10일 한국언론사상 처음으로 미주지역에 신문지면의 위성송전을 시작함으로써 서울-로스앤젤레스 동시 신문발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1987년 4월 11일 백상재단을 설립하고, 같은 해 8월 17일부터 3일간 ‘국제올림픽 문화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1988년 8월 1일 자매지 『서울경제신문』을 복간하였고, 8월 15일부터는 언론사상 최초로 기자인턴제를 실시하였다. 1989년 2월 11일 자매지 『서울경제신문』을 별도법인 주식회사로 등록하였다. 같은 해 7월 3일 한국언론사상 최초로 월요일판를 발행하였다.

1990년 7월 1일 매일 24면, 주 168면 발행을 단행하여 종합 일간신문 증면 발행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1991년 12월 16일부터는 석간 발행을 단행하여 조 · 석간 양간제 시대를 부활시켰다. 1992년 9월 1일부터 CTS제작을 가동하였고, 같은 해 11월 30일에는 그간 발행해 오던 석간을 휴간하였다. 1998년 2월 2일에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꾸고 3월 16일부터 전면 가로쓰기를 시행하였다. 1974년 6월 9일 창립 20주년을 맞아 『한국일보20년』, 1984년 6월 9일 30주년을 맞아 『한국일보30년사』, 1994년 40주년을 맞아 『한국일보40년사』, 2004년 50주년을 맞아 『한국일보50년사』를 출간하였다.

1999년 3월 15일에 지면을 개편하여 12페이지 생활섹션을 신설하고 오피니언면을 확대시켰다. 또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한국언론사상 최초로 점자신문 『함께 사는 세상, 함께 읽은 세상』을 격주 월요일 타블로이드 28면으로 발행하였다. 2002년 2월 장재구 대표이사가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3월 18일 8면을 증면한 48면 체제로 전환하였고, 다음해인 2003년 3월 3일에 56면으로 증면하였다.

주요 사업으로는 한국창작문학상 · 신춘문예 · 한국문학번역상 · 한국출판문화상 · 1,000만원고료장편소설 등 5대문화상을 비롯, 백상장학금(百想奬學金) · 재단법인 설문걸장학재단(薛文傑奬學財團) 등의 장학기금,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 · 미스코리아선발대회 · 한국음악콩쿠르 · 백상체육대상 ·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 · 명인전 등의 문화 · 예술 · 체육행사와, 한국거북이마라톤대회 · 국민식생활개선운동 · 10만어린이부모찾아주기캠페인 ·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 녹색생명운동 등의 범국민운동을 주관, 개최하고 있다.

참고문헌

『2009 한국신문방송연감』(한국언론재단, 2009)
『한국일보50년사』(한국일보사, 2004)
『’98한국신문방송연감』(한국언론연구원, 1998)
『韓國新聞百年誌』(尹壬述編, 韓國言論硏究院, 1983)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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