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출신으로 호는 백상(百想)이다. 한남보통학교(漢南普通學校)를 거쳐,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광복 후 1948년에는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한국은행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에 사임하고 경영난에 『조선일보』 취체역 사장이 되었다.
『 조선일보』의 지사와 지국을 정비하고 편집진을 보강하고 1954년 4월 방일영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1953년 한일회담 대표단원으로 일본과 교섭하였다.
1954년 5월 『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발행하다 제호를 『 한국일보』로 바꾸어 창간했고 자매지로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와 『주간 스포츠』를 창간했다. 1957년 황태영(黃泰永)에게서 KORCAD-TV를 인수하여 대한방송주식회사(DBC-TV)를 설립하고 3시간여의 텔레비전 방송을 실시했다. 1959년 사옥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AFKN-TV의 지원으로 방송을 이어가다가 1961년 10월 군사 정권이 DBC-TV의 채널을 회수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1960년에는 『서울경제신문』과 『 소년한국일보』를, 1969년에는 『 일간스포츠』를 창간하였고, 이어 『주간한국』과 『주간여성』 등 여섯 개의 자매지를 발행하였다.
군사정변 이후인 11월 『한국일보』가 군사정변세력의 사회노동당 주비설을 보도했다가 이 때문에 사장으로 책임을 지고 구속되고, 『한국일보』의 자진휴간 후 석방되었다.
한편, 1961년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회장, 최초로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에 우리 축구팀 단장으로 원정했다.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 및 아시아경기연맹 회장, 196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정일권(丁一權)내각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발탁되어 금리현실화와 유리창행정, 연탄의 흑백논쟁 등 일화를 남겼다. 한일회담에 막후에서 관여했으며, 1969년 한일간의 현안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대통령특사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에 한일협력위원회를 창설, 창립총회 부의장이 되었다.
1971년 민주공화당 서울특별시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공동위원장대리로 활동했다.
수교훈장 광화장을 비롯하여 청조 근정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그리고 인권옹호상 · 체육공로상 · 최고체육장을 받았다. 외국으로부터는 독일1등대십자공로훈장과 월남보국2등훈장, 중화민국1급 문화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