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목포 출신. 아버지는 호남은행(湖南銀行) 목포지점장이 던 건홍(健洪)이며, 어머니는 허고도(許古道)이다.
목포북교보통학교(北橋普通學校)에 입학,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상경하여 교동보통학교(校洞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7년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수석합격하였다. 1942년 일본 시코쿠(四國)고치고등학교(高知高等學校), 1944년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법문학부법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6월 일본군에 징병당하였다.
같은 해 9월 광복으로 귀국하여 바로 미군정청 외무처(外務處)에 들어가 1947년 외무처 동경공관의 섭외담당관으로 파견근무하였고,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는 주일 대표부 서기관급으로 봉직하였다.
1950년 5월 재일동포 김남희(金南姬)와 혼인하고, 같은 해 6월 주일대표부를 떠나 한국은행 조사부장이던 장기영(張基榮)을 도와 한국은행 동경지점 개설에 공헌하였다. 뛰어난 영어실력과 개설업무의 능력을 인정한 장기영은 1952년 3월 한국은행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경영난에 빠졌던 조선일보 사장이 되면서 그를 외신부장으로 기용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으나, 외신의 정리·편집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종군기자를 자원하여 전선취재에 뛰어들었다. 1954년 6월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간하자, 한국일보 외신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5년에는 편집부국장으로 승진, 1956년 6월 영자지 ≪코리아타임즈≫ 편집국장으로 발탁되었다.
1957년 1월 11일 한국언론의 권위 있는 친목·연구 단체인 관훈(寬勳)클럽을 창립하였다. 신문에 대한 정열이 대단하여 관훈클럽을 통하여 신문주간 창설을 발기하였고, 그 행사의 주체로 같은 해 4월 7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탄생시키고, 이날을 ‘신문의 날’로 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편집국장이면서도 일선 취재를 희망, 1958년 7월 인도네시아 내란을 취재하였다. 곧이어 9월에는 중국과 자유중국의 전쟁이 한창이던 대만해협의 진먼〔金門〕섬에 뛰어들어 11일 1차 지프차 사고로 중상, 26일 부상한 몸으로 다시 진먼섬에 상륙하려다가 조난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