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연 각 6행 총 12행의 서정시. 1922년 1월에 간행된 『백조(白潮)』 창간호에 발표하였다.
이 시는 이상화가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 ‘말세’로 표현되는 세상에 대한 한탄과 절망, 인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의 내용을 간추리면, 1연은 “저녁의 피 묻은 동굴” 속으로 “거꾸러지”고, “파묻히”겠다는 내용이고, 2연은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 “술 취한 집”을 세우고, “속 아픈 웃음”을 빚겠다는 내용이다.
1연에서 주목되는 것은 “피 묻은 동굴”과 “밑 없는 동굴”로 표현된 현실인식이다. 이 작품의 발표 시기와 제목의 의미를 고려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피 묻은 동굴”은 온갖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당시의 식민지 현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그 식민지 현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밑 없는 동굴”인 것이다. 이런 절대적 상황 속에서 화자는 “거꾸러지”고, “파 묻히”겠다는 한탄과 절망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2연에서는 “술 취한 집”을 세우겠다는 화자의 의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 “술 취한 집”을 세우겠다는 것을 일부 평자는 ‘절망과 관능에의 도취’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화자의 의지는 1연에서와 같은 절망적 태도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술 취한 집”이지만, 그것을 세우겠다는 것은 1연에서의 ‘하강’의 이미지와 달리, ‘상승’의 이미지인 것이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행 “속 아픈 웃음을 빚”겠다는 표현은 예사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이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감내하겠다는 강인한 인고(忍苦)의 태도로 파악된다.
한편, 이 작품에 나타난 ‘동굴’의 이미지는 『백조』 3호에 발표한 「나의 침실로」에도 나타난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저녁의 피 묻은 동굴(洞窟)속으로/아- 밑 없는 그 동굴(洞窟) 속으로/끝도 모르고/끝도 모르고/나는 꺼꾸러지련다/나는 파묻히련다.//가을의 병든 미풍(微風)의 품에다/아- 꿈꾸는 미풍(微風)의 품에다/낮도 모르고/밤도 모르고/나는 술 취한 집을 세우련다/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발표 당시 이 시의 말미에는 “비음(緋音) 가운데서”라는 표기가 붙어 있다. 전집을 참고하면, 초기작 중에 「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등 6∼7편의 작품이 “비음” 연작에 해당된다.
1922년『백조』 2호에서 박종화는 이 작품을 두고 “근래에 얻을 수 없는 강한 백열(白熱)된 쇠같이 뜨거운 오열(嗚咽)의 노래”였다고 언급했다. 최근의 한 연구 논문은 이 시가 “파멸의 절망을 미화하지 않고 파멸에의 의지를 직설적으로 확인”하고 있으며, “자기 실현이 불가능하자 오히려 동굴을 지향함으로써 현실 도피적인 주체 탐색을 시도”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