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경상남도 창원 출생. 호는 살매. 해인대학 문학부 졸업했다. 마산, 부산 등지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50년 첫 시집 『땀과 장미와 시』를 발간하고 시인으로 활동했다.
김태홍은 1925년 3월 20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생했다.
1946년 9월 마산여중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1947년 3월 부산에서 염주용(廉周用)이 발간하는 『문예신문』에 시 「고향」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1950년에 첫 시집 『땀과 장미와 시』(흥민사)를 발간했으며, 1951년 마산상고에서 근무했다. 1953년 손동인(孫東仁), 안장현(安章鉉) 등과 함께 〈시문(詩門)〉 동인회를 결성하였으며, 이 무렵 이석, 김춘수, 정진업, 김수돈 등과 함께 「낙타」동인으로도 활동했다. 1954년 제2시집 『창(窓)』(자유문화사), 1958년 제3시집 『조류(潮流)의 합창』(인간사)을 발간했다.
1960년 마산상고에 재학 중이던 김주열이 3ㆍ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실종된 한 달 후인 4월 10일 최루탄(催淚彈)이 눈에 박힌 채 유기(遺棄)되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자, 김태홍은 이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마산은!」이라는 작품을 4월 12일에 『부산일보』에 발표하였다. 김주열의 사진과 함께 실린 이 시는 4ㆍ19혁명의 촉매제 같은 역할을 했다.
1961년 5ㆍ16 이후 교직에서 파직되었다. 당시 김태홍은 부산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겸했는데 그가 쓴 논설이 문제가 되어 구금되었다. 그후 구금에서 풀려나서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이 되었다.
1963년 부산고등학교에 다시 복직했다.
1965년 제4시집 『당신이 빛을』(청구문화사), 1973년 제5시집 『공(空)』(시문학사), 1982년 제6시집 『훗날에도 가을에는』(갑인출판사)을 출간했다.
1963년 수필집 『고독을 강물처럼』(인간사)을 발간했다.
1985년 11월 4일, 충렬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에 췌장암으로 타계했다.
1960년 부산시문화상을 수상했다.
김태홍은 시대와 역사를 증언하고 고발하는 언론인이자, 교사, 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내유외강의 지성인’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