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월성(月城). 별명은 이연호(李然浩)·이직(李直).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 대구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로 이시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우로는 이상화(李相和, 李尙火)·이상백(李相佰)·이상오(李相旿)가 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큰아버지가 경영하던 신학문과 민족정기의 요람이었던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 육군유년학교)를 마치고 미술학교·상업학교를 거쳐 고쿠가쿠인대[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19년 귀국, 3년간 행동적 사도(師道)로서 오산(五山)·경신(儆新)·계성(啓聖)·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1923년 만주로 망명, 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뒤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중국 펑위샹[馮玉祥]장군의 서북국민부대의 장성참모로서, 장개석(蔣介石)군대와 통합된 후에도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서 항일전선에 참전하였다.
그 뒤 상해와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우창[武昌]·북경까지 독립 일념으로 중국의 군벌·학자들과 만나면서, 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윤봉길(尹奉吉)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했으며,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충칭육군참모학교(重慶陸軍參謀學校)의 교관을 지냈다. 1938년 김구·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유동열 등과 신한민주혁명당(新韓民主革命黨)을 조직해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중국 육군유격대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1942년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난징전[南京戰]·한커우전[漢口戰]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국 북지나방면 최고사령관 및 그 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다.
연합군 동경 진주의 중국군사령부의 막료로 임명되었으나, 소망인 일본군 타도가 실현되었으므로 모든 지위를 사퇴하였다. 충칭에서 광복된 조국의 앞날을 신익희(申翼熙) 등과 토론, 상해로부터 급히 와서 도와달라는 교민들의 요청으로 상해에서 중국인들의 한국인 박해로부터 교민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40여 일만에 뇌일혈로 죽었다.
유고로 『표박기(飄泊記)』가 있고, 시(詩)·서(書)·화(畫)에 능하였으며,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