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노동자투쟁 ( )

현대사
사건
1972~1978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972년
종결 시기
1978년
발생 장소
동일방직
관련 국가
대한민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동일방직(東一紡織) 노동자투쟁(勞動者鬪爭)은 1972~1978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이다. 남성 중심의 어용 노동조합에 대항하여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5월 10일 처음으로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고 민주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회사 측과 남성 노동자들의 방해와 폭력,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부당한 개입에 저항하였다.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를 무산시키려는 똥물투척사건이 일어나자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 농성으로 대항하였지만, 회사 측에 의해 집단해고가 되었고 이후 복직 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의
1972~1978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
발단

동일방직은 1955년 인천시 동구 만석동에 설립된 방직공장에서 연원하여 1966년 1월 동일방직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1970년대 대표적인 섬유류 제조업체가 되었다. 동일방직의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1946년 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 1972년까지 역대 위원장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여성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어용 노동조합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경과 및 결과

1972년 5월 10일 노동조합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주길자가 선출되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처음으로 여성 지부장이 되었다. 여성 위원장이 주도하는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시작이었다. 1975년에는 여성 노동자인 이영숙이 다시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회사 측과 남성 노동자들은 불신임안을 제출해 노동조합 집행부를 교체하려 하였다.

1976년 7월 23일 남성 노동자들의 고발로 이영숙 지부장이 연행되고 남성 노동자들은 대의원대회를 열어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에 반발하며 2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철야 농성에 들어가고 지부장 석방을 요구하였다. 회사 측이 수도와 전기를 모두 끊어 버렸지만 800여 명이 농성에 참여하였다.

7월 25일 오후 5시 경찰은 강제 진압을 개시하였고 그에 맞서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반나체 시위를 하며 저항하였지만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72명이 연행되고 50여 명이 기절하였으며 14명이 병원에 실려 갔다. 7월 26일 여성 노동자 300여 명은 출근하지 않고 섬유노동조합 본조에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여 밤 11시경 지부장 등이 석방되었다.

1977년 1월 21일 노동조합원들은 ‘동일방직사건수습투쟁위원회’를 구성해 각계에 사건 진상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여 노동청의 중재로 자율적인 대의원대회 개최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 노동자들의 방해와 난동이 있었지만, 1977년 4월 4일 여성 노동자 이총각이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8년 2월 21일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회사 측과 섬유노동조합 본조가 합세하여 민주노동조합를 파괴하려고 “ 도시산업선교회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라는 빨갱이 불온 단체가 배후에 있다.”라고 선전하였다.

2월 21일 새벽 이른바 ‘똥물투척사건’이 일어났다. 남성 노동자들이 조합원 투표를 준비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뿌리며 방해하였다. 3월 6일 섬유노동조합 본조는 동일방직 노동조합를 ‘사고 지부’로 규정하고 이총각 등 4명을 반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제명하였다.

3월 10일 76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근로자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식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대부분 바로 연행되었지만 나머지는 명동성당으로 가서 14일 동안 단식 농성을 전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중재로 회사에 복귀하였지만, 회사 측은 노동조합 탈퇴 각서를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무단결근을 이유로 4월 1일 124명을 해고하고 2명을 자진 퇴사시켰다.

섬유노동조합위원장 김영태는 해고 노동자 126명의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배포하여 취업을 못 하게 하였다. 4월 26일 해고 노동자 65명은 대의원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회사에 들어가 농성하였지만, 전원 연행되고, 4월 28일 박복례 지부장이 선출되어 새로운 집행부가 구성되었다.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 투쟁을 전개하였다.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일방직 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였다는 것을 밝혀 내고, 신청자 74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으며 34명의 복직을 권고하였지만 회사 측은 거부하였다. 2018년 12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은 동일방직복직추진위원회(위원장 최연봉) 14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총 4억5천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의의 및 평가

동일방직 노동자투쟁은 1970년대 섬유산업의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한 대표적인 민주노동조합운동이었으며, 1980년대 인천 지역의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이매진, 2006)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2006)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엮음,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돌베개, 1985)

인터넷 자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s://www.kdemo.or.kr/blog/70s/post/110)

신문 · 잡지

「민주노조 세운 여공들... 똥물도 이들의 저항 정신은 막지 못했다」(『경향신문』, 2020. 12. 16)
「알몸 시위로 버틴 여성들에 '똥물'을 뿌린 남자들」(『한겨레』, 2013. 1. 5)
집필자
김정한(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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