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朴勝熙)는 1972년 4월 2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목포 정명여고를 졸업하고 1990년 전남대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하였다.
박승희는 고등학교 시절 목포 고교생 YMCA에서 활동하였고 학생회장에 출마하기도 하였으며,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창립 이후 전교조 가입 교사에 대한 부당 징계에 대해 항의하는 징계 철회 투쟁에 참여하였고, 참교육 1세대로 불리는 ‘자주교육쟁취고등학생연합’(자고연)에서 활동하였다. 전남대학교 입학 후에는 학과 대의원, 교지 『용봉』 편집위원회 수습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평소 환경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외국산 커피와 콜라를 마시지 않는 등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은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강경대(姜慶大) 학생이 1991년 4월 26일 백골단의 폭행으로 사망한 후 전국적으로 강경대를 추모하고 노태우 정권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집회와 시위가 전개되었다. 박승희는 4월 29일 2시 전남대학교에서 개최된 ‘강경대 살인 만행 규탄 및 살인 정권 폭력 정권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에 참석하고, 3시경 전남대학교 본부(용봉관) 뒤쪽에서 분신하였다.
박승희의 분신은 강경대의 죽음이 1991년 5월 투쟁으로 이어지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박승희 이후에 5월 1일 안동대학교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학교 천세용, 5월 8일 김기설, 5월 10일 윤용하, 5월 18일 이정순, 전라남도 보성고등학교 김철수, 광주 운전기사 차태권, 5월 22일 광주 정상순, 6월 8일 인천 노동자 이진희, 6월 15일 인천 택시 노동자 석광수 등 학생, 빈민, 노동자 등 11명이 ‘노태우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하였으며, 5월 6일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의문사 사건, 5월 25일 성균관대학교 학생 김귀정이 시위 도중 폭력 진압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1991년 5월 투쟁은 검찰이 조작한 ‘유서대필사건’으로 인해 급속히 동력을 상실하였다.
박승희는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노태우 정권 타도, 미국 놈들 몰아내자.”라고 손가락 글씨로 구호를 적기도 하였다. 5월 19일 강경대 시신 운구가 경찰 병력과 충돌하며 광주 시내로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승희가 사망하자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강경대 운구가 금남로 도청 노제를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1991년 5월 25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고, 도청 노제를 지내고 광주광역시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1998년 창립된 박승희추모사업회는 2004년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로 재창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2014년 6월 박승희장학재단이 설립되어 정명여고와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2005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