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청년회전국연맹(한국YMCA)는 기독교 청년들의 운동 단체이다. 1903년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아펜젤러 등이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였다. 청년YMCA는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미국식 교육과 문화 활동, 기술 등을 소개하였다. 일제강점 하에서 쇠퇴해가는 농촌 방면에도 관심을 돌려 농민의 생활 향상, 의식 개발, 단결력 강화 등에 기여하였다. 1990년대부터 시민운동, 환경 운동, 시민권익 보호 운동, 청소년 운동 등을 펼쳐오고 있다. 2019년 현재 전국 62개 도시(지역 YMCA)에서 10만여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약칭 한국YMCA(Kore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이다. 기독교청년회(YMCA)는 1844년런던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 영적 상태의 개선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YMCA운동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1855년에 세계YMCA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세계 120여개국에 1만여의 조직을 가진 최대의 기독교민간단체로 발전하였다.
한국YMCA는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교육과 문화활동을 소개하고, 농촌사업을 통해 민중의 복지향상에 기여하였으며, 한국의 근대화에 공헌을 하였다. 또한 일제 말기의 수난기와 해방직후의 혼란기를 거쳐 운동을 재건, 자립체제를 구축하고 1976년에는 '한국YMCA목적문'을 제정하여 운동의 이념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급격한 산업화로 사회문제들이 점차 심각해짐에 따라, 시민사회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고 정책화시키기 위하여 전국규모로 시민자구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898년독립협회의 해산과 지도자들의 투옥으로 지식층 애국청년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자, 언더우드(Underwood,H.G.)·아펜젤러(Appenzeller,H.G.) 등 초기 미국선교사들은 이들 청년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기독교청년회를 구상하고, 북미YMCA국제위원회에 한국YMCA의 창설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1901년 창설 전문간사로 질레트(Gillett,P.L.)가 파송되었다. 질레트는 배재학당 안에 학생YMCA를 육성하는 한편,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YMCA 창설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03년 10월 28일에 창립총회를 열고,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가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1913년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개칭하였고, 1914년재일(在日) 한국YMCA를 비롯한 배재학당 등 9개 학생YMCA를 망라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가 만들어졌다.
1918년부터 함흥·대구·평양·광주·전주 등 도시에 도시YMCA가 조직되었으며, 1925년 전국의 18개 학생YMCA가 결성되었다. 그 뒤에 여러 번의 개칭을 거쳐, 당초의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서울기독교청년회로,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는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으로 불리게 되었다.
창설 당시 한국인 지도자는 김필수(金弼秀)·여병현(呂炳鉉)·최재학(崔在學)·김규식(金奎植) 등 소수에 불과했으나, 5개월 뒤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상재(李商在)·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윤치호(尹致昊)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대거 가입하여 YMCA는 독립협회운동의 후계자 구실을 하게 되었다.
1904년 현재의 YMCA회관의 자리인 종로2가에 대지를 마련하여 가건물을 짓고, 1908년 3층 현대식 회관을 준공하였다. 이 때부터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기계와 기술을 도입하여 목공·철공·제화·염색·사진·인쇄 등 기술교육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유도·검도·야구 등 운동경기와 환등회·토론회·강연회·연극 등 문화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0년고양군 진관사(津寬寺)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학생YMCA 연합하령회(聯合夏令會)가 열렸고, 이 무렵 미국에 망명하여 있던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여 학생부 담당 간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YMCA를 식민통치의 암적 존재로 지목하고, 이의 말살을 꾀하여 이른바 105인사건을 날조, 윤치호·이승훈(李昇薰)·양전백(梁甸伯) 등 YMCA 지도자들을 주모자로 몰고, 신천의 신성학교(信聖學校),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 학생YMCA회원들을 모두 검거하였다. 또한 총독부는 당시 부총무이던 김린(金麟)과 일반회원들을 매수하여 총회 때 헌장을 개정하고 외국인 총무와 이사들을 추방하는 동시에,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일본인들을 앞장세워 YMCA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05인사건과 유신회사건으로 윤치호는 6년형을 받아 투옥되었고, 학생운동의 총수격인 이승만과 김규식은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총무 질레트는 해외로 추방되고, 회장 저다인(Gerdine,J.L.)도 압력에 못 이겨 사임하게 되었다. 여기에 1906년 이후 왕실로부터 받던 경상비 보조도 끊기자 YMCA는 재정난까지 겹쳐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 때 남아 있던 이상재가 총무직을 맡아 공업부 사업에 주력하여 재정난을 극복하는 동시에, 지방과 학생YMCA 재건에 주력하고 명칭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바꿈으로써 일제의 압력을 일단 무마시킨 다음, 1914년 마침내 국내외 여러 YMCA조직을 규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5년 윤치호가 석방되어 총무가 된 뒤로 한국YMCA는 한국인 자체의 운동체로 확립되어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실내체육관을 건립하여 1916년에 개관하는 한편, 공업교육을 더욱 강화, 육성해나갔다.
당시 인문교육은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져 일시 폐쇄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그 대신 음악회·연극회·환등회 등을 활발히 공개함으로써 이를 통하여 애국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기여하였다.
또한 일본 유학중이던 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백남훈(白南薰) 등 YMCA 간부들은 학우회(學友會) 간부들과 함께 2·8독립선언을 하였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박희도(朴熙道)·오기선(吳基善) 등 학생부 지도자들과 신흥우(申興雨)·오화영(吳華英)·이상재·김필수 등 YMCA 원로급 지도자들은 천도교 지도자들과 밀회를 거듭하여 3·1독립운동의 민족적 단결을 다져나갔다.
3·1운동으로 YMCA회원들도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그 뒤 일제의 문화정책을 틈타 YMCA는 조직망을 전국으로 확산시켜 1925년 전국에 18개 학생YMCA을 조직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1921년부터 기관지 〈청년 靑年〉을 월간으로 발행하여 민족언론의 선구적 구실을 담당하였으며, 평양YMCA 총무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시작된 물산장려운동과 금주·단연·절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22년YMCA전국연합회는 일본YMCA동맹과의 관계를 끊고 1924년세계YMCA연맹에 직접 가맹하였으며, 한편 학생YMCA도 세계기독학생연맹에의 가입이 승인되어 한국YMCA는 일제강점 하에서도 완전독립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 하에서의 YMCA운동은 점차 쇠퇴해가는 농촌방면에도 관심을 돌려 여러 도시에 농민회를 세우고 촌락에는 농민협동조합·소비조합·저축조합·야학 등을 세워, 농민의 생활향상·의식개발·단결력강화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양돈·양계·양토 등 축산의 장려와 농업기술 도입으로 농촌경제 수준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8·15광복 후 YMCA재건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서울YMCA회관이 소실되는 등 다시금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재건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어, 1951년 3년정기대회 때 이제까지의 3년대회를 2년대회로 변경하고 연합회를 연맹으로 개칭, 1958년부터 YMCA회관의 재건운동을 전개하여 국내 모금운동이 추진되었다.
1967년서울의 YMCA회관이 준공된 뒤로는 회세가 급격히 강화되었으며, 1969년부터 학생YMCA는 YMCA연맹에서 이탈하여 나갔으나, YMCA학생클럽은 그대로 성장하여 ‘와이스맨스운동(Y’s Men’s運動)’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1965년 ‘사업평가제’를 도입한 이후 1970대와 1980년대에 걸쳐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사업활동의 전문화를 추진하였으며, 1990년대부터 시민운동, 환경운동, 시민권익 보호운동, 청소년운동 등을 펼쳐오고 있다.
YMCA운동의 기본 조직단위는 자발적인 소모임 및 회원 조직이다. 초기의 YMCA는 선교의 목적의식을 지닌 청년들의 자발적 결사로 나타났으며, 이것이 세계적인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YMCA는 각 지역의 시청년회(지역YMCA)를 모체로 하여 한국YMCA전국연맹, 아시아.태평양YMCA연맹, 세계YMCA연맹으로 이어지는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다. 또 각 지역의 시청년회는 회원 조직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각 지역YMCA는 연맹의 산하단체가 아니고. 연맹은 지역YMCA가 함께 모여 YMCA운동을 조정하고 협의하는 협의체로서, 각 지역YMCA는 YMCA운동의 이념과 목적을 공유하며, 인사, 재정 등 기구 운영을 독립적으로 유지한다.
각 지역YMCA는 독립된 하나의 YMCA운동의 지체로서 독자적 활동 계획과 조직 구조를 가질 수 있으나, 파리원칙과 한국YMCA목적문 등 세계YMCA와 한국YMCA가 동의한 운동의 원칙과 전통을 지켜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각 지역YMCA는 서로 다른 회원 체계와 조직 구조를 가질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청년YMCA 클럽, 대학YMCA전국연맹 / 대학생클럽, 고교YMCA, 어린이 Y, 중학Y, 생협 등대 모임, 각종 자원봉사 조직, 기타 회원조직(문화, 체육, 취미 등), 국제 와이즈멘클럽과 같은 회원 조직과 회 체계를 가지고 있다.
2019년 현재 전국 62개 도시(지역 YMCA)에서 10만여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