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 출생. 17세 때 관비생으로 평양에서 3년간 신·구학문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도부인 전삼덕(全三德)의 영향을 받아 감리교에 입교, 그 후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노블(Noble, W. A.)선교사에 의해 함종 교회 전도사로 정식 임명되고, 1909년 미국 감리교조선연회에 입회하면서 감리교협성신학교(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 1911년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2년부터는 해주읍교회·동대문교회 목사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서울YMCA에 관여하는 등 청년운동에도 헌신하였다. 1914년에는 일본 동경 한인교회 목사로 부임, 약 2년간 최승만(崔承萬)·백남훈(白南薰) 등과 함께 동경YMCA사업을 지도하였다.
1916년 귀국 후로는 평양교회와 진남포교회 목사로, 1917년 인천지방 감리사로 선교활동을 하던 중, 3·1운동을 맞아 기독교와 천도교의 합동거사를 추진하는 등 시위에 앞장섰다.
1921년 다시 동경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동경YMCA를 지도하고 있을 당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일본인들의 한국인집단학살사건이 벌어지자, 재해동포위문단을 조직하여 본국 교회들과 연관을 맺으면서 피살자가족의 위문과 구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24년 귀국 후부터 1939년 은퇴하기까지 15년간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평양지방 감리사로 선교 사업에 헌신하면서, 1930년 남북감리교회를 통합하여 단일교회인 조선감리교회를 탄생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은퇴 후 황해도 배천에서 광복을 맞아 월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