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자유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개 정당이 합당해 창당된 정당이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이 국회 재적 의석수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정국운영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을 만나 정당 합당을 위한 비밀협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국회재적 의석수 3분 2를 차지하는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다. 그러나 계파 간 권력암투가 계속되었고,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계가 다수파가 되었다. 이후 김종필의 공화계가 탈당하고 신한국당으로 변경하였다.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 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 3개 정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졌다.
1988년 4월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시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국회재적의석수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당시의 국회재적의석수 299석 중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이 125석을 차지하였고, 야당들인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 통일민주당, 민주공화당은 70석, 59석, 35석을 각각 차지하였다.
3개 야당은 국회에서 협조체제를 구축, 국회에서 과반수의석을 확보하여 대통령 노태우가 이끄는 민주정의당 정권에 지속적인 정치공세를 가하였다. 그로 인하여 민주정의당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여 행정권을 장악하였으나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 집권당이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경제적 ·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었다.
노태우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89년 말부터 통일민주당의 총재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의 총재 김종필을 상대로 민주정의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 등 3개 정당을 합당하기 위한 비밀협상을 전개하였다.
노태우 · 김영삼 · 김종필 3인은 3당을 합당할 것과 합당 후 3인 및 3정파간의 권력분점과 내각책임제로의 개헌 등을 밀약하고, 1990년 1월 3당합당을 공동선언 하였으며, 그 뒤 3당은 각기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여 기존의 당을 해체하는 등 합당수속을 밟았다.
이러한 3당합당과정에서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은 내부 진통을 겪지 않았으나, 통일민주당은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통일민주당의 일부 당원들은 야당이 여당과 합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김영삼의 합당참여방침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내 다수파는 이러한 합당반대파의 저항을 숫자의 힘으로 제압하면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하고 민주자유당창당에 참여하였다. 합당에 반대하던 통일민주당내 소수파는 별도로 민주당이라는 당명의 소규모 정당을 창당하였다.
해체된 3개 당의 합당수임요원들은 1990년 2월 9일 3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진 정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민자당은 국회재적의석수의 3분의 2를 초과하는 국회의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민자당은 그 해 5월 9일 합당후 첫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당총재에 노태우, 대표최고의원에 김영삼, 최고의원에 김종필과 박태준(朴泰俊) 등을 각각 선출하였다. 이 같은 민자당의 지도부 구성은 합당전의 3당대표들을 고루 안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안배의 원칙은 민자당의 중요 당직과 행정부의 각료임명에도 적용되었다.
이처럼 당간부직과 내각에 3당출신의 인사들이 고루 안배되기는 하였으나 3당출신의 인사들은 완전히 융합되지 못한 채, 합당전의 3개 당이 고스란히 민정계 · 민주계 · 공화계 등 3개의 파벌로 변질되어 파벌간에 치열한 권력암투를 벌였다.
이러한 권력암투는 김영삼과 민주계가 합당협상에서 밀약한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거부하고 그에 반발하여 민정계와 공화계가 협력하여 김영삼을 거세하려하자 더욱 심화되었다. 3계파간의 권력암투는 제14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해인 1992년에 접어들면서 절정에 달하였다.
암투 끝에 김영삼이 민자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탈당하여 이종찬(李鍾贊)을 중심으로 새한국당이라는 소규모정당을 만들었다. 노태우도 표면상으로는 대통령선거를 공정관리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기 수개월 전에 민자당을 탈당하였다.
1992년 12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이 이듬해 2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 민자당과 행정부는 종전의 3개 계파 안배원칙이 무시된 채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민주계에 의하여 전단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에 민정계와 공화계는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두 계파의 불만은 1994년부터 표면으로 노출되기에 이르렀고, 민주계는 당의 인적구성에 있으서 소수파인 자기들의 세력을 다수파로 전환하고, 민정계와 공화계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그 두 계파에 비판적인 인물들을 끌어들였다. 그런 과정에서 민자당의 기존 노선과는 융합할 수 없는 좌익활동 경력을 가진 인사들까지 끌어들였다.
이에 대한 민정계와 공화계의 반발이 심하였으나 김영삼과 민주계는 김영삼이 차지하고 있는 대통령과 총재의 권력을 배경으로 민주계를 다수파로 만들고 민정계와 공화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작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공작에 밀려, 김영삼의 대통령당선 이후 민자당의 대표직을 맡아온 공화계의 보스 김종필이 자기의 계파를 이끌고 1995년 2월 대표직 사퇴와 함께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自由民主聯合)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다.
김영삼과 민주계의 민정계에 대한 무력화 공작은 민정당의 창립주이자 민정계의 정신적 지주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투옥할 수 있는 5·18특별법을 제정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김영삼은 민자당에 남아 있는 민정당의 심리적 잔재를 청소하기 위하여 당명을 신한국당(新韓國黨)으로 변경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에 따라 민자당 간부회의는 1995년 12월 5일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꾼 지 며칠 뒤 노태우와 전두환이 잇따라 구속되었으며, 그 뒤 공포에 질린 민정계는 완전히 침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