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남북공동선언은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정상들이 직접 만나 성사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1993년에 불거진 북한의 핵카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은 당시 방북하고 있었던 전 미국 대통령 카터(Jimmy Carter)의 중개로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김일성주석의 대를 이어 북한을 통치하게 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89년부터 찾아온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극한적인 경제문제 해결과 남북대화 및 협력을 위해 김대중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여 성사되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서라는 명분하에 한국의 김대중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6·15남북공동선언은 남북의 정상들이 백화원 영빈관에서 6월 14일 오후에 3시간 넘게 진행한 회담에서 합의하여 밤 11시 20분경 서명, 다음날인 6월 15일 공식 발표한 것으로 다섯 개항의 합의 내용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내용을 명시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동선언내용의 합의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된 부분은 제2항 통일방안이었는데,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 쟁점이 되었다.
남북공동선언 5개 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2) 남과 북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3) 남과 북은 2000년 8월15일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합의한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 (5) 위의 네 개항의 합의 사항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남과 북의 당국이 빠른 시일 안에 관련 부서들의 후속 대화를 규정하여 합의 내용의 조속한 이행을 약속한다.
위의 5항에 의해 이를 실천하기 위한 후속조치로 실무회담을 통한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남북장관급회담,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구성 등이 이루어졌으며, 남북분단으로 단절되었던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을 위한 복원공사가 착수되었다. 이로 인해 대북사업의 전권을 가진 현대와 북한이 합의하여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특구와 남북관광교류사업의 상징인 금강산특구가 개방되었으나, 2008년 7월 11일 남한 관광객이 피격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지금까지 금강산관광사업은 중단되었으며, 북한이 독자적으로 중국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개성공단 조성사업은 지난 2000년 8월 현대와 북한이 합의한 사업으로, 개성직할시 일대에 800만평 규모의 공단과 1,200만평 규모의 배후단지를 조성해 국내기업을 유치한다는 구상이었지만 중단위기를 여러번 겪는 가운데 현상은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2004년 12월 15일 북한 개성시 봉동리 일대에 조성된 개성공단 시범단지에서 첫 제품이 생산됐다.
김대중정부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의 적대적 북한관에서 벗어난 햇볕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남한에서는 정파적 이익관계로, 주변국은 국가이익을 위해 한국의 대북포용정책을 비난했다. 표면상으로 햇볕정책을 계승한 것으로 보여지는 노무현정부의 대북정책인 평화번영정책이 그 뒤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15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정책상의 소기 목적은 현실화되지 못한 채 특히 북핵 문제로 인해 남북불신은 6·15남북공동선언 이전으로 회귀한 셈이 되었다. 여기서 북핵문제란 북한이 1993년 핵개발 및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발언과 ‘서울 불바다’론을 들고 나온 이후,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 2012년 4월에 발사했던 ‘광명성3호’와 3차 핵실험 예정설이다.
이러한 북한의 위협적인 핵 도전으로 현 이명박정부는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의 정상회담 및 그 성과인 공동선언에 대해 평가를 절하한 대북정책을 펴 그 어느때 보다도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다.
6·15남북공동선언은 분단 55년 만에 처음 만난 남·북한의 두 정상이 이룩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에게 분단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희망과 경제교류 및 협력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제5항에 명시된 북한의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에 관한 내용이 성사되지 못했고, 두 주역이 사망함으로서 역사적 평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실효성이 중단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