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은 주거를 위하여 여러 공간을 넣어 지은 건축물이다. 우리나라 주택의 역사는 원시시대의 움집과 귀틀집, 고상식주거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신분에 따른 주택 규모의 규제 아래 상류주택은 기와집, 서민주택은 초가로 구별되는 주택문화가 정착했다. 목조건축물에 온돌과 마루를 결합한 형태구조, 풍수지리설을 기초로 한 자연친화적 집터 선정이 특징이다. 건축재료, 주택형식 등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획기적으로 변화하는데 연립주택과 아파트도 이때 등장하며 재료도 시멘트와 벽돌로 바뀌어 전통가옥은 한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주택이라는 말은 머무를 주(住)와 집 택(宅)의 합성어로서 그 뜻은 사람이 들어와 사는 집을 말한다. 이 말은 순수한 우리말인 ‘집’에 대한 한자어로 외래어이며, 같은 한자어인 주거(住居)와 유사하나 전자가 집 그 자체의 건물만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생활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가옥(家屋)이라는 말도 집 자체를 뜻하며, 저택(邸宅)은 비교적 큰 집을 말한다. 한편 민가(民家)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건축가가 건축하기보다 목수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로 지은 일반 백성들의 집을 일컫는다.
또 『삼국사기』권33 잡지 2에 보이는 옥사(屋舍)도 집을 말하는 것이며, 일제강점 이후 양식과 일본식 건축과 구별하여 전래된 전통적인 집을 한옥(韓屋)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순수한 ‘집’이라는 말은 단순히 건물 자체만을 뜻하지 않는다. 예컨대 “저 집은 큰집이다.”라고 하면 건물 자체가 큰 것을 말하면서도, 장남의 집을 일컫기도 한다.
또 “저 집은 높은 집이다.”라고 하면 건물이 높기도 하고, 집주인의 신분이 높기도 한 것이다. “저 집은 양반집이다.” 할 때는 집의 격(格)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살림집은 오늘날의 병용주택이 아닌 순수하게 사람들이 사는 집을 말하며, 여염집은 관가나 창가(娼家) 등과 구분되는 일반백성들의 집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집의 개념은 가족구성원 · 거주지 · 건물 · 생활정도 · 동족 · 친족 등을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인 것이다.
우리 나라 주택에 대한 관심은 1923년 7월 이마와[今和次郞]가 조선총독부의 의뢰로 조사한 「조선의 지방주가(朝鮮之地方住家)」에 이어 「조선의 민가(朝鮮の民家)」를 발표하면서 주택평면형을 일반형과 북선형(北鮮型) 두 가지로 나눈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계속하여 일본인 이와키[岩規善之]의 북선형 · 서선형 · 중선형 · 경성형 · 남선형의 다섯 가지 평면형 분류와 무라다[村田治郞] · 후지시마[藤島亥治郞]의 연구, 그리고 이들을 종합분석, 비판한 노무라[野村孝文]의 북선형 · 일반형 · 도회형 · 제주도형의 네 가지 분류로 일단락을 보았다.
1947년에는 장기인(張起仁)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가옥일반구조(朝鮮家屋一般構造)」를 『조선건축(朝鮮建築)』에 발표하였고, 이로써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우리 나라 주택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손진태(孫晉泰)의 「고대민가형식고(古代民家型式考)」 · 「온돌고(溫突考)」, 김정기(金正基)의 「온돌에 있어서의 2,3의 고찰(溫突についての二, 三の考察)」 등 주로 온돌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에는 천병옥(千炳玉)의 「이조시대 주택의 장식적 의장에 관한 연구」와 주남철(朱南哲)의 「한국주택의 변천과 발달에 대한 연구」, 김정기의 「한국주택사」가 발표됨으로써 통사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 후반에는 우리 주택의 개별적인 조사 ·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주택을 공간적인 측면에서 다루기 시작하여 환경과 주택과의 관계,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식과 주택과의 관계 등의 연구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지리학분야에서도 우리 주택을 연구하여 장보웅(張保雄)은 「제주도 민가의 연구」 · 「청산도 민가의 문화지리학적 연구」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7년에는 김일진(金一鎭)의 「까치구멍집에 관한 고찰」, 김정기의 「문헌으로 본 한국주택사」, 1978년 김홍식(金鴻植)의 「선사시대 살림집의 구조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어, 우리 나라 주택연구의 기틀을 더욱 굳게 하였다.
현두용(玄斗鎔)은 「한국건축의 양택론에 관한 고찰」을 발표하여 풍수와 주택건축과의 관계를 밝혔으며, 김삼대자(金三代子)의 「고려시대의 주택」, 1979년 윤장섭(尹張燮)의 「한국과 일본의 민가건축 비교고찰」, 1980년 주남철의 「한국주택건축」, 1988년 김광언의 「한국주거민속지」, 1992년 김홍식의 「한국의 민가」, 1999년 주남철의 「한국의 전통민가」 등의 저술이 속속 발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류가 지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이는 홍적세(洪績世)에 해당된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 구석기시대의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였고,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석장리유적, 굴포리유적, 제주도 빌레못동굴 · 노현리동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유물들이 출토되었지만, 아직은 구체적으로 주거의 구조를 이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물론 서양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움집이나 돌로 벽체를 쌓아만든 원형주거들이 영위되었다고 학계에서는 인정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보다 많은 유적지의 발전과 발굴이 있은 뒤라야 추정할 수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후일의 논의로 일단 미루어두는 것이다.
구석기시대 다음으로 오는 중석기시대는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고 있어 신석기 시대로 건너뛰게 된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해변과 강가, 호수가에 집을 마련하고 고기잡이와 짐승들을 잡아먹고 살던 사람들로 이들은 주로 움집[竪穴住居]을 만들고 생활하였다.
이들 움집터를 보면 그 평면의 형태는 원형 · 타원형 그리고 네 모서리를 둥글게 죽인 네모평면을 이루며, 땅으로부터 40cm바닥에서 1.5m 정도의 깊이로 파서 바닥을 만들었고 중앙에는 불을 지핀 화덕자리[爐址]가 있었다.
이들 집터에서 발견된 것은 기둥자리 · 서까래 조각 등으로 집의 모양을 추정하면 집터 바닥에 세운 기둥 사이에 가로로 굵은 나뭇가지를 엮어 이곳에 서까래를 땅위에서부터 걸쳐 풀 · 나뭇가지 · 흙 등으로 지붕을 만든 움집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움집 속에서 남자들이 쓰던 석기와 여자들이 사용하던 토기들이 서로 반대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을 보면, 하나의 공간 속에서도 기능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지탑리 유적에서 피와 조의 탄화된 알갱이들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농경생활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며, 이는 장차 단순한 집만이 아니고, 곡물을 쌓아둘 곳간의 건축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 우선 지금까지의 도구가 석기였던 것에서 금속기로 바뀌기 때문에 자연히 주택건축도 이에 따라 한 걸음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 추측된다.
이들 금속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그간의 발굴된 집터 등을 종합하여 볼 때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적을 때에는 여러 채, 많을 때에는 100여채의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면서 농사 · 고기잡이 · 목축으로 생활하였다.
이들 집들은 평면이 네모 또는 길쭉한 네모로서 대략 그 크기는 4∼5×5㎡, 4×7㎡이며, 땅으로부터 50∼100cm 정도 파서 바닥을 만든 것이었고, 중앙에서 안쪽으로 조금 치우쳐 화덕자리가 있었다.
또 이들 집터 중에는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新興洞) 제2호에서 처럼 칸막이 흔적이 있는 것도 있으며, 또 신석기시대처럼 저장공(貯藏孔)들이 없는 것을 보면, 따로 저장공간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집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집규모가 커진 것이다.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 덕은리의 것은 서기전 7세기경의 것으로, 동서 길이 15.7m, 남북 너비 3.7m, 깊이 40∼90cm되는 큰 것이었고 화덕자리도 두 개나 나왔다고 한다. 이로써 원시시대의 집은 움집으로 시작되어 도구가 금속기로 변함에 따라 점차 규모가 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서기 후부터 300년경까지의 여러 부족들이 성읍국가(城邑國家)를 이루었던 원삼국시대의 주택에 대하여는 집터들과 중국 쪽의 문헌들로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김해조개더미 등의 유적에 의하면 구릉지를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점차 강구(江口)의 삼각주지방으로 진출하여 농경생활과 목축생활을 하면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중국 쪽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 『진서(晉書)』등의 기록에 의하면, 읍루 · 고구려 · 옥저 · 동예 등에서는 심혈(深穴)로 표현되는 움집에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변한과 진한에서는 통나무를 잘라 우물처럼 만든 귀틀집[累木式住居]에서 생활하였으며, 읍루에서는 여름이면 고상식주거(高床式住居)에서 생활하였다.
따라서 원삼국시대에서는 원시시대의 움집과 귀틀집, 고상식주거 등 여러 형태의 주택들이 건축되었으며, 더욱이 지배계급에서는 낙랑 등을 통하여 한나라의 좀더 발달된 목조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여 이들 주택들과는 다른 궁실건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300여년경에 삼국은 왕권이 강화된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고, 건축도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된 것을 여러 곳에서의 건축지(建築址)와 출토유물 · 관계문헌 등으로 알 수 있다.
건축의 가장 기본이 되는 주택건축 역시 성읍국가시대보다는 상당히 발전된 것이었는 바 우선 고구려의 주택건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주택건축이 현존 유구(遺構)가 없는 이상 이에 대한 고찰은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등의 문헌과 고분벽화, 출토된 와당 · 가형토기 등으로 가능하다.
주택은 지배계급의 상류주택과 피지배계급의 서민주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당서』의 기록에 “산곡(山谷)을 의지하여 집을 짓고, 지붕은 대와 풀로 덮은 초가였으나, 왕궁과 절 · 신묘(神廟) · 관아 건축은 기와지붕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겨울이면 장갱(長坑)을 만들어 아래에 불을 때어 따듯함을 취하였다(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其俗貧寠老多冬月皆作長坑 下燃熅火以取暖).”라 하였고, 또 동수묘(冬壽墓)의 부엌간이나 고깃간 등의 벽화를 보면, 상류주택은 기와집이었고, 서민주택은 초가였음을 알 수 잇다.
그리고 이들의 구조는 기둥과 도리 · 보[樑]를 쓴 목조가구식구조(木造架構式構造)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민주택은 겨울에는 온돌을 만들어 추위를 막은 것을 위의 ‘장갱(長坑)’이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상류주택에는 온돌이 널리 쓰이지 않고, 쌍영총(雙楹塚) 주실(主室) 북벽(北壁)의 묘주(墓主) 내외가 평상 위에 평좌(平座)하고 있는 모습이나, 무용총(舞踴塚) 주실 북벽에서 의자 · 탁자 등과 휘장(揮帳)들이 쳐진 것으로 보아, 입식(立式)생활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의 방장(房帳)처럼 두꺼운 직물들을 써서 추위를 막았다고 생각된다.
또 동수묘의 부엌간 · 고깃간 · 차고 · 외양간 등이 별채[別棟]로 건축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주택이 안채 · 사랑채 등 따로따로 건축된 것처럼 기능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주택에 관계된 자료는 삼국 중에서 제일 빈약하나, 『신당서』 동이전 백제조에 “그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俗與高句麗同).”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주택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군수리사지(軍守理寺址)나 그 밖의 사지에서 출토된 와당(瓦當)들,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중공전(中孔塼) · 산경무늬전 · 동탑편(銅塔片) 등과 백제 건축가의 작품으로 알려진 일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오층탑 등을 볼 때 주택건축 역시 고구려처럼 목조가구식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권2 남부여전 백제북부여조에 “사비의 언덕에 한 바위가 있었는데, 10여명이 앉을만하였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하려고 할 때는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를 망배하였던 바 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지므로 돌석이라 불렀다(又泗沘崖有一石可坐十餘人 百濟王欲王興寺禮佛 先於此石望拜佛 其石自暖因堗石).”고 기록되어 있는 바 여기서 저자 일연(一然)이 돌석(堗石)에 아무런 주(註)를 알지 않았고, 또 따뜻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것은 바로 온돌이 백제 말기에는 일반적인 구조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었던 장갱, 즉 온돌은 점차 남쪽지역으로 전파되어, 삼국시대 말기에는 백제에서도 일반적인 구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와 통일신라시대는 분명한 선후의 차가 있고, 또 주택도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존하는 자료들로는 이들을 확실히 구분하여 고찰할 수 없는 실정이다.
『삼국사기』권33 잡지 2 옥사조(屋舍條)에는 당시 집의 규모와 장식을 계급에 따라 한정짓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기록되어 잇다. 이 가사규제에서 아랫계급의 규제사항을 해석하면, 그것이 바로 윗계급의 주택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들을 해석하면 진골계급의 주택, 즉 당시 왕궁 다음에 오는 귀족계급의 주택은 실(室)의 크기는 24척(尺)을 넘을 수 없었고, 지붕은 기와지붕을 하되 막새기와를 쓰지 못하였고, 합각(合閣)에는 현어(懸魚)로 장식하지 못하였다.
또 금과 은, 유석(鍮石: 청동과 황동)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오채(五彩), 즉 청 · 백 · 적 · 흑 · 황의 다섯가지 색채로 장식하는 단청(丹靑)을 칠하지 못하였다.
계단에는 다듬은 돌을 쓰지 못하였으며, 삼중계(三重階)를 설치하지 못하였고, 담장에는 양동(樑棟)을 설치하지 못하였으며, 석회칠을 하지 못하였다.
발[簾]의 가장자리에는 비단을 대어 그물모양으로 꾸미지 못하고, 여러 가지 꽃무늬로 수(繡)를 놓지 못하였으며, 병풍에도 수를 금하였다.
바닥에는 대모(玳瑁, 瑇瑁)나 침향(沈香)과 같은 고급목재를 사용하지 못하였으나, 육두품 주택에서 금하였던 자단(紫壇) · 황양(黃楊)과 같은 목재는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중문(重門)과 사방문(四方門)을 달 수 있었고, 말(馬)은 5필 이상을 기를 수 있었다. 이처럼 귀족계급의 주택은 궁궐건축보다는 못하였으나, 당시로서 상당히 화려한 주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두품부터 백성의 주택들도 실의 크기가 15척을 넘지 못하고, 우물천장을 가설하지 못하며, 막새기와를 쓰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으나,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11에 “ 헌강왕 6년 9월 9일에 좌우 신하들을 거느리고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경주의 민옥(民屋)들이 연이어져 있고,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아 왕이 시중(侍中)벼슬에 있는 민공(敏恭)에게 ‘짐이 듣기에 근자에 민간에서는 초가 지붕이 없고 숯으로 밥을 짓는다니 정말인가?’ 하고 물으니, 민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그렇게 들었습니다.’(王與左右登月上樓 四望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朕聞今之民間覆屋以瓦不以茅 炊飮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기록에서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내용을, 신라에는 온돌이 없었다는 사실로 해석하여 왔으며, 더욱이 『신당서』 동이전 신라조에 “겨울에는 당 안에 부뚜막을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놓고 먹는다(冬則作竈堂中夏以食氷上).“는 기록과 함께 생각하여 겨울에 당 안에 부뚜막을 만든다는 내용이 그러한 단정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름에 얼음 위에 음식을 놓고 먹는 계급이란 궁궐에 출입할 수 있는 극히 일부의 귀족계급이었으며, 또 겨울에 당 안에 만든 부뚜막을 여름이면 부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름에는 사용하지 않고 밖에서 밥을 짓는다는 해석이 타당하기 때문에 신라에 온돌이 없었다는 단정은 곤란하다.
특히 이러한 생각은 조선시대의 주택에 있어서도 여름이면 부엌의 부뚜막에 불을 때지 않고, 부엌뜰에 화덕을 만들고, 거기에서 밥을 지으며, 최근 안압지 발굴조사에서 풍로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더더욱 타당한 것이다.
다음 신라의 주택에는 바닥구조로 마루구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위에서 말한 『삼국사기』옥사조의 진골계급에서 바닥에 대모나 침향 같은 고급목재를 사용할 수 없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4의 판옥(板屋)과 판방(板房)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바닥에는 융단과 같은 직물을 깔고 생활한 것이 일본 쇼소인[正倉院] 소장의 신라융단으로 입증된다.
또 최근 안압지에서 출토된 발고리는 위에서 말한 『삼국사기』 옥사조의 ’발‘에 대한 기록을 입증해주며, 이것은 융단과 더불어 신라의 주택에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직물류가 창호나 벽, 또는 바닥에 쓰인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려는 918년에 개국하여 935년(태조 18)에 통일신라를 평화적으로 정복하였고, 다음해에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여 이루어진 국가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주택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주택을 계승한 것이었고, 이것이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천되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택건축이란 일단 건축되면 상당한 기간 그 건축에서 생활하며, 설사 왕조가 바뀐다고 곧 건축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려의 주택 역시 목조가구식으로 귀족계급은 기와집이었고, 서민계급은 초가에서 생활하였다고 생각된다.
1123년(인종 1)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의 수행원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 권3 민거조(民居條)에서 “왕성은 컸으나 자갈 · 산두둑이 많아 지세는 평평하지 못하여 집들이 높고 낮게 터를 잡아, 마치 벌집이나 개미집과 같이 보였고, 지붕을 띠로 덮어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였으며, 그 크기가 두 서까래 사이를 겨우 넘을 정도였다. 부잣집은 기와를 지붕에 얹었는데, 그런 집은 열 집에 한두 집이었다. 예로부터 전해오기는 창우집에는 긴 장대를 세워 일반 여염집과 구별한다 하였으나,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귀신을 받들고 기양하는 기구들을 보다 좋게 하는 것 뿐이었다(王城雖大 磽确山壟 地不平曠 故其民居 形勢高下 如蜂房蟻穴 誅茅爲蓋 僅庇風雨 其大不過兩椽 比富家稍置瓦屋 然十纔十二耳 舊傳唯倡優所居 揭長竿 以別良家今聞不然 蓋其俗 淫祠鬼神亦厭勝祈禳之具耳).”라 하였으니, 이 내용으로 보아 전술한 추측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권28 공장 1 와탑조(臥榻條)에 “침상 앞에는 다시 낮은 평상을 놓고 삼면에 난간을 세우고, 각기 비단보료를 깔았으며, 또 큰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편안하여 조금도 오랑캐 풍속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이나 귀족들의 예이고, 이로써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는 것뿐이다. 일반 상사람들은 대부분 흙침상으로 땅을 파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그것은 겨울이 워낙 춥지만 솜과 같은 것이 적기 때문이다(臥榻之前 更施矮榻 三面立欄楯 各施錦綺茵裖 復加大席 莞簟之安 殊不覺有夷風 然此國王貴臣之禮 兼以待使華也 若民庶 則多爲土榻穴地爲火坑 臥之 蓋其國冬月極寒 復少纊絮之屬爾).”라 기록하였으니, 상류주택에서는 침상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서민주택에서는 고구려의 온돌구조가 그대로 계승,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온돌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고 생각되니, 그것은 최자(崔滋)의 『보한집』에서 묵행자(默行者)에 관한 기록 중 “빙돌에 앉았는데 조금도 추운 기색이 없다(坐氷堗上寒色不形).”고 하면서 빙돌(氷堗)에 대하여 하등의 주도 없고, 또 같은 글에서 ‘아궁이(堗口)’가 나타나는 것이나, 또한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후집(後集) 권7 난돌조(暖堗條)에서도 “겨울에 빙돌에 누우면 추운 기운이 뼈속까지 스며들어……(冬月氷堗寒威來刮骨……)”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주해가 없는 것을 보아 그러하다.
한편 신라에서 건축되었던 마루구조도 고려시대의 주택에서 널리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는 바 이인로(李仁老)는 「공주동정기 公州東亭記」에서,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서, 농사를 장려하고, 이의 직책을 다할 장소가 중요한 바 이에 동정(東亭)이 가장 적절하다.
왜냐하면 동정은 손님을 맞고 손님을 배웅할 수 있고, 또 농사장려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남면하여 몸채를 지었는데, 서청과 남무가 14칸이요,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차릴 장소와 겨울에 거처할 욱실과 여름에 거처할 양청을 마련하였다(南嚮而崇主宇 西廳南廡 共十四間 更衣之次 設食之所 冬以燠室 夏以涼廳).”고 하였다.
이 글에서 겨울에 쓸 욱실(燠室)은 온돌방을 일컫는 것이며, 여름에 쓸 양청은 마룻바닥으로 된 대청을 말하는 것이다. 12∼13세기에는 이미 온돌방과 마룻방이 널리 보급되어 일반적인 건축물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말기에 주택건축에 나타난 두드러진 변화는 가묘(家廟)건축이라 하겠다. 즉 정몽주(鄭夢周)는 향교(鄕校)를 진설하고 처음으로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라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묘를 세우게 하였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주택, 특히 양반집에 건축되었던 사당(祠堂)이 고려말부터 건축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의 주택은 모두 단층으로 건축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권28 충렬왕 3년 7월에 “관후서에서 말하기를 도선의 비기에 따르면 평지에는 고루를 지어야 하고 산지에는 평옥을 지어야 합니다. 산이 많은 산지는 양이고, 평지는 음이며, 고루는 양이고 평옥은 음이고, 우리 나라는 산지로 되어 만약 고옥을 지으면 쇠퇴할 것입니다.(觀候署言 謹按道詵密記 稀山爲高縷 多山爲平屋 多山爲陽 稀山爲陰 高樓爲陽 平屋爲陰 我國多山 若作高屋 必招衰損 故太祖以來 非惟闕內 不高其屋 至於民家) ”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전국토의 3분의 2가 산지로 된 우리 나라의 경우 음양오행론에 맞추어 조화를 이루도록 단층의 주택을 주로 건축한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고려 시대 초기부터도 풍수지리설이 택지선정에 깊은 영향을 주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집을 짓기 위해서 지상에 집터[垈地]를 마련하고, 이 집터 위에 집을 앉히는 배치계획에는 일찍부터 풍수지리에 입각한 바 이는 이미 고려시대의 주택에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택의 집터를 정하고 집을 어떻게 앉히는 가의 문제는 모두 풍수지리의 양택론에 속하는 문제이다. 양택론에서는 집을 앉히는 좌향(坐向: 집이 앉음으로써 좌가 생기고, 그 집이 향하는 방위로써 향이 생긴다.)에 따라, 동사택(東四宅)과 서사택(西四宅)으로 크게 구분된다.
동사택은 그 좌향이 임좌병향(壬坐丙向) · 자좌오향(子坐午向) · 계좌정향(癸坐丁向)의 남향집과 갑좌경향(甲坐庚向) · 묘좌유향(卯坐酉向) ·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서향집을 말한다. 서사택(西四宅)은 술좌진향(戌座辰向) · 건좌손향(乾坐巽向) · 해좌사향(亥坐巳向)의 남동향집과, 축좌미향(丑坐未向) · 간좌곤향(艮坐坤向) · 인좌신향(寅坐辛向)의 남서향집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양택론에 입각하여 모든 주택이 배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 주택의 배치평면 결정에 깊은 영향을 주어온 것은 사실이다.
특히 좌향과 더불어 안방 · 부엌 · 대문 · 측간(厠間)을 집의 사주(四柱)로 하여 함께 생각해 온 것은 그 평면구성 결정에 기본적인 원인이 되었고, 평면의 형태도 길상형으로 구자형(口字形) · 월자형(月字形) · 일자형(日字形) · 용자형(用字形)을 즐겨 썼고, 불길한 의미를 지닌 시자형(尸字形)과 공자형(工字形)은 피하였다.
다음 배치와 평면에 영향을 준 것은 기후적인 원인이라 생각한다. 여기에는 춥고 긴 겨울에 거처할 온돌방, 특히 안방과 더운 여름에 거처할 마루방 · 대청 그리고 부엌이 어떠한 모습으로 결합되느냐에 따라 많은 평면의 변화를 볼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서민주택의 평면형태는 우리 나라의 다양한 기후지역에 따라 함경도지방형 · 평안도지방형 · 중부지방형 · 서울지방형 · 남부지방형 · 제주도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 평면형태는 서민주택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중인계급과 이교(吏校)계급의 중류주택, 그리고 양반계급의 상류주택에서는 사회적 신분적으로, 또 경제적으로의 우위성 때문에 주로 안채에 이들 평면형이 적용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전술한 양택론의 길상형이 더 한층 많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주택의 배치와 평면에 있어 또 하나의 문제점은 대가족제에 따라 주택의 규모가 커지고, 또 별채들이 건축되는 것과 남녀구별의식 · 내외법(內外法)의 영향으로 여인의 공간인 안채 · 내측(內廁),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 · 외측이 따로 구분되어 건축되는 것이다.
심지어 남자의 주공간인 사랑채에는 침방을 따로 건축하고, 평상시 주인은 이 방에서 잠을 자는 바 이는 『태종실록』 권5 태종 3년 5월 계묘조(癸卯條)에 “오부에 부부가 따로 잘 것을 명하니(下令五部 夫婦別寢禮曹以月令講之也)”라 한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 초기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 조선시대의 주택에는 사당이 건축되는데, 이는 이미 고려말에 정몽주가 주자의 『가례』에 의하여 건축한 데서 비롯되어 태조 4년(1395) 12월 지익주사 민유의(閔由義)가 가묘를 세웠고, 또 태조 6년 4월에는 사대부의 가묘제를 간관이 상서하였고, 태종 13년(1413) 5월에는 한성부가 가묘제를 권장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초기부터 건축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민주택과 같이 집이 작을 때에는 한 실을 깨끗이 하고 여기에서 제사를 지내도 된다고 하였다. 실제적으로 서민들은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라 부르는 사당을 그린 족자에 위패를 붙여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다.
끝으로 조선시대 주택의 배치와 평면에 있어 그 규모가 결정되는 것은 신분제도에 따른 가사규제에 의하는 바 이는 세종 13년(1431) 정월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 대군(大君) 60칸부터 서민 10칸까지 차등을 두었고, 이보다 앞선 태조4년에는 한양(漢陽)의 땅을 계급에 따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조선시대 주택의 배치 · 평면은 정치 · 신분 · 경제 · 민간신앙 · 기후 등 다양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결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 1]은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동에 있는 중인(中人)주택으로 1820년대에 건축된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줄행랑이 서 있다. 행랑마당 서쪽에 선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는 사랑마당이 되고, 또 바른쪽 중문을 돌아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른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침방 · 사랑방 · 대청 · 건넌방으로 구성되고, 남향한 전면에 툇마루가 길게 늘어서 있다. 사랑채 남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광이 건축되어 있다. 안채는 부엌 · 안방 · 대청 · 건넌방이 ㄱ자로 배치되고, 이에 다시 윗방이 안방 북쪽으로, 작은 대청과 또 다른 건넌방이 건넌방 남쪽으로 배치되고 있다.
부엌 뒷문으로 나가면 별채가 있는데, 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마루방으로 그 중 제일 북쪽에 있는 것이 사당(祠堂)으로 “사실(祠室)”이라 편액하였다. 외측은 사랑마당 남동쪽 모퉁이에 있고, 내측은 안채 옆 줄행랑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림 2]는 서울특별시 중구 수하동 김씨가(金氏家)로서 1800년대에 건축된 한말의 대신가(大臣家)이다. 줄행랑에 건축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되고, 이 행랑마당에서 앞에 보이는 중문간 행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된다.
사랑마당에 있는 사랑채는 침방 · 누마루 · 사랑방 · 대청으로 구성되고, 사랑채 뒷마당에서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간 행랑마당이 된다. 중문간 행랑마당은 행랑마당을 통해서도 들어서게 되는데, 이 마당에서 다시 작은 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안마당에 이른다.
안마당에는 안채가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안채는 부엌 · 안방 · 대청 · 건넌방이 ㄱ자형 평면을 이루어 서울지방형의 기본평면을 이루면서 누마루가 건넌방의 북쪽으로 건축되어 있다. 안채 뒤로는 별당이 있고, 그 옆으로 사당이, 그리고 안채 동쪽으로는 또 다른 별당(안사랑)이 건축되어 있다.
목조가구식으로 민도리집양식과 익공식(翼工式)으로 건축되었다. 민도리집양식은 농촌주택과 서울의 서민주택, 중인과 이교의 주택, 양반집 등에 널리 쓰였고, 익공식은 양반집, 특히 지방에 건축된 양반집에 쓰였다. 그러나 같은 민도리집이라 하더라도 그 세부수법에서는 각 계급간에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점을 보면 [표]와 같다.
조선시대 주택의 공간구성은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다르고, 또 이 공간들은 서민계급, 중 · 상류계급은 거의 공통적인 점이 많으나, 서민계급은 신분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중 · 상류계급보다 열등한 공간구성을 이룬다. 따라서 대표적인 상류주택의 공간구성만을 고찰하고 서민계급과 중류계급은 이에 준하여 생각하도록 한다.
5.3.1. 내부 공간
가) 안채 : 주로 부인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주택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다. 몸채 · 내당 등으로 불리며 그 세부구성은 다음과 같다.
㉠ 안방 : 안주인의 일상거처실로서 이 방에서 식사도 하고 취침도 한다. 이 방에는 직계존속 이외의 남자 출입은 금지된다. 바닥은 장판지로 마감한 온돌바닥이고, 벽과 천장은 종이로 마감한다.
아랫목은 안주인의 자리로 다락문을 등지고 보료를 깔고, 좌우로 사방침(四方枕)과 장침(長枕)을 늘어놓고 편안하게 기대도록 안석(案席)을 다락 쪽으로 놓는다.
안마당 쪽으로 난 쌍창(雙窓) 아래에는 문갑을 놓거나, 아니면 옆마당을 향한 벽 쪽으로 난 창호, 또는 벽 쪽으로 쌍문갑을 놓는다. 또 반닫이나 장과 농을 놓으나, 일반적으로 장과 농은 안방 위쪽의 윗방 윗목에 늘어놓는다. 문갑 위나 반닫이 위에는 경대를 놓아두었다가 필요한 때 바닥에 내려놓고 사용한다.
또 벽에는 빗접고비나 서간고비를 걸어두고, 유경이나 등잔대를 세워둔다. 방 윗목 양쪽 귀퉁이에는 사방탁자(四方卓子)를 놓고 모과 같은 향기로운 과일을 그릇에 담아 얹어둔다.
병풍은 보료 주위에 치거나, 외풍을 막기 위하여 창 쪽으로 친다. 벽에는 방장(房帳)을 치고 창에는 문면자[무렴자, 몰면자]를, 천장에는 앙장(仰帳)을 쳐서 외풍을 막는다.
㉡ 대청 : 대청은 우물마루로 된 바닥과 서까래가 노출되는 연등천장을 이루는데, 이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어 이들 두 방에 드나드는 전실(前室) 역할을 하며, 또한 무더운 여름의 거처실이 되기도 한다. 안방과 대청 사이, 또 건넌방 사이에는 모두 들어열개로 된 불발기 창호를 달아 여름에는 모두 접어서 들쇠에 매단다.
그리고 기둥사이 인방 아래로 발이 쳐지고, 바닥에는 강화산 돗자리가 깔린다. 대청의 가구는 윗목 귀퉁이에 사방탁자를 놓거나, 또는 안마당 쪽으로 뒤주를 놓고 작은 단지들을 얹어두지만 반빗간[飯婢間]이 따로 지어지는 대가(大家)에서는 뒤주를 반빗간에 배치한다.
㉢ 건넌방 : 며느리방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이때에는 윗목에 장과 농을 놓고 그 위에 색실함과 반짇고리를 얹어둔다.
㉣ 부엌과 반빗간 : 안방쪽으로 부뚜막을 만들고 솥을 건다. 부뚜막 위는 안방에서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이 되고, 부엌 상부는 다락의 바닥이 된다.
마당 쪽의 부뚜막 위에는 살창을 달고 부엌 옆마당 쪽 벽에는 교창을 달아 환기를 한다. 부엌 옆에는 찬간을 건축하고 식탁을 두어 그릇을 보관하고 찬장을 두어 반찬을 보관한다. 소반들은 벽에 못을 쳐 걸어두거나 시렁에 얹어둔다.
부엌바닥은 흙바닥이나, 찬간은 우물마루로 되거나 온돌방으로 되어 찬방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대가에서는 부엌자리에 누다락을 두어 여름에 안방마님의 거처가 되게 하고, 조리는 반빗간을 별채로 건립하여 행한다. 따라서 부엌에서 쓰는 기구들은 모두 반빗간에 비치되고, 반빗아치와 찻집들이 취사작업을 한다.
나) 사랑채 :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주택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다. 보통 안채와 바깥행랑채 사이에 위치하며 사랑방 · 대청 · 침방 등으로 구성된다.
㉠ 사랑방 : 남자주인의 일상거처실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인은 중앙관서에 출입하거나, 지방에서는 문중을 대표할 때가 많으므로 정치 · 사회 방면의 교류가 이 사랑방에서 이루어진다.
바닥은 장판지마감의 온돌이고 벽과 천장은 종이마감이다. 다락문를 등지고 주인이 앉도록 보료를 깔고 장침과 사방침을 놓고 안석을 기대어 놓는다. 남창(南窓) 아래에는 쌍문갑을 놓고, 문갑 위에는 필가(筆架)나 필통 또는 등대(燈臺)를 놓는다.
보료 앞에는 담배함 · 재떨이 · 담뱃대꽂이 등을 늘어놓고 또 연상(硯床)을 놓는다. 또 타구를 놓고 요강도 놓을 때가 있으며, 방 윗목으로는 사방탁자 한 쌍을 마주보게 놓고, 서고에서 꺼내온 서책을 얹어두고, 모과 같은 향기 있는 과일을 그릇에 담아 얹어둔다.
보료 주위로는 병풍을 치고 방장을 치는데, 이의 색은 회색바탕에 곤색이나 검정색의 무늬를 수놓는다. 물론 창에는 문면자[무렴자, 몰면자]를 치나 이의 색은 방장에 준한다.
㉡ 대청 : 대청은 사랑방과 누마루에 출입하는 전실의 기능을 가지며, 무더운 여름의 거처실이 된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사랑방과 누마루 쪽의 창호는 불발기 들어열개 창호로 구성된다.
대청 윗목에는 사방탁자를 양쪽에 놓고 그 밖의 가구들은 놓지 않는다. 다만 여름에는 돗자리를 깔고, 살평상을 놓기도 하며, 이 살평상에는 죽부인(竹夫人)을 놓아둔다.
㉢ 침방 : 사랑채의 침방은 주인이 잠을 자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내외법은 평상시 주인은 사랑채 침방에서 잠을 자도록 한 바, 침방이 없는 서민주택에서는 사랑방을 침방으로 사용하였다.
이 방에는 가께수리를 놓아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보료를 깔고, 장침 · 사방침을 사랑방처럼 늘어놓는다. 요강 · 타구 등과 망건꽂이 · 남자용 의걸이 · 관모상자 등이 이곳에 비치되기도 한다.
5.3.2. 외부 공간
외부공간은 안채 · 사랑채 · 별당 등과 행랑채 또는 담장과의 사이 공간으로 이루어 진다. 때로 채[棟]들과 이 채들 앞 · 뒤 · 옆으로 펼쳐진 담장이나 행랑으로 막히지 않은 공간으로도 구성되기도 한다. 보통 채를 둘러싼 땅을 마당이라 부르고, 채와의 방향에 따라 앞마당 · 뒷마당 · 옆마당 등으로 불린다. 따라서 외부공간은 마당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이 되고, 이 행랑마당은 옥외작업 공간이 되기도 한다. 장작을 패서 장작광에 옮겨진다. 또 행랑마당의 행랑채에는 말을 키우거나, 가마를 두는 가마고가 건축됨으로써, 이에 부수되는 행위가 이 마당에서 이루어진다. 지방에서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자리잡기도 한다.
행랑마당을 통해 들어서는 사랑마당에는 담장 밑에 석함(石函)을 늘어놓고, 담모퉁이에 몇 그루 나무를 심고, 또 석련지(石蓮池)를 놓아 연꽃을 기르기도 한다. 때로 사랑채 앞에 석류 세 그루를 심는데, 이것은 부귀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 대석(臺石)이 놓이기도 하며, 노둣돌[下馬石]이 댓돌 아래 놓인다.
그러나 노둣돌은 솟을대문 밖에 놓일 때가 많다. 다만 이때에는 사랑마당에 놓이는 노둣돌이 ㄴ자형으로 다듬은 것이라면 대체로 직육면체로 생긴 커다란 막돌을 놓는 것이 다르다.
혼인과 같은 경사 때에는 사랑마당이 내부공간이 못 다 이룬 기능을 다해주게 된다. 즉 사랑마당에 당중(堂中)하여 차일(遮日)을 치고 여기에 병풍을 치고 탁자를 설치하여 전안청(奠雁廳)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중문을 통하여 들어서는 안마당은 안채와 중문간 행랑채 그리고 담장으로 구성되는데, 이곳에도 담장 아래에는 몇 그루 나무를 심고 대석을 놓는다.
그리고 지방의 주택에서는 안마당이 대부분 사랑채 뒷벽과 안채사이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이 안마당에는 부엌 앞으로 물확(돌확)이 놓인다. 이때 이 물확은 곡식을 빻는 돌절구가 그 주된 목적이 된다.
안채 옆, 특히 부엌 쪽의 옆마당에는 장독대가 설치되고, 한 두 그루의 나무가 심어지며 안채 뒷마당에는 일반적으로 동산을 이루면서 나무들이 심어진다. 때로 장독대가 안채 뒤쪽으로 설치될 때도 있다.
끝으로 정자는 연못과 함께 건축되는데, 연못은 네모난 방지가 일반형이며 방지 중앙에는 원형의 섬을 만드는데, 이것은 방장(方丈) · 봉래(蓬萊) · 영주(瀛州)의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또 산정(山亭)을 건축할 때에는 여러 층으로 석단(石段)을 만들고, 단마다 여러 꽃을 심어 화계(花階)를 이루도록 한다. 그리고 주택의 뜰에 심는 나무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활엽수들이 주종을 이루어, 수목의 변화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바 이것은 우리 나라의 기후가 사계(四季)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말기인 1800년대에 들어와 실학(實學)이 대두, 번성하였고,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점차로 토지제도나 행정기구의 개혁을 꾀하게 되었다.
특히 1800년대 말인 1894년(고종 31)에 일어난 동학란과 갑오경장은 양반과 상민의 계급차별을 없애고, 의복 등의 간소화, 노예제도 및 역인(驛人) · 창우(倡優) · 피공(皮工) 등의 천민대우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혁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적용되어 오던 가사규제가 사실상 철폐됨으로써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뜨고 재력을 지니고 있었던 중인계급은 신분제에 의한 주택크기의 제한을 의식하지 않고 건축할 수 있었다.
예컨대, 서울 다동(茶洞)의 중인 주택이었던 백씨가(白氏家) 사랑채는 1904년에 건축한 것으로 사랑채 자체의 규모도 크지만, 이미 건축된 백씨가가 확장된 것인 만큼 전체적으로 볼 때 굉장히 큰 것으로, 부(富)로써만 규모를 확장할 수 있다는 데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다음 양반가의 상징이었던 솟을대문이 중인주택에도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서울 무교동의 신씨가(辛氏家)는 1900년대에 다른 곳에서 솟을대문을 옮겨와 평대문과 교체한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양반집에서는 양반체면이 손상되었다 하여, 반대로 솟을대문을 헐고 평대문으로 바꾸었다 한다. 중인계급에서는 전래의 사당을 개조하여, 목욕간을 만들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변화는 특히 일찍 개화에 눈을 돌렸던 중인계급의 주택에서 많이 일어났다.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주택건축에 일어나기 시작한 또다른 변화의 하나는 외래양식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1882년 한미수호조약 등으로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 거류민의 수적 증가와 서양인의 거주로 일본식 주택의 급증은 물론 양식건축의 주택들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양식주택으로 믿어지는 것은 1884년 인천에 건립된 세창양행의 사택이었다. 건평 173.15평, 일부 이층으로 된 벽돌집으로, 외벽은 회칠하고 붉은기와를 얹은 별장류의 건축이었다.
1903년에 착공, 1905년에 준공한 인천 북성동의 존스턴(Johnston, J.)별장은 석조 4층 건축물로서 연건평 452.98평의 기와집이며, 특히 이 별장에는 옥상에 물탱크를 설치하고 옥내에서 스팀난방을 한 것이었다.
이처럼 양식건축의 도입과 더불어 시멘트 · 유리 · 벽돌 · 콘크리트 등의 새로운 재료들이 점차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난방법으로 스팀난방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인들에 의하여 건축된 일본식[和式] 주택도 급증하여 1922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에 1921년 중 건축된 일본식 집이 875동 1만 7208평이고, 조선식 집이 498동 6240평이며, 1924년 11월 24일자에서는 서울의 6만 3967동 건물 중 조선식 집은 1만4742동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돌집 · 벽돌집 · 콘크리트집 · 일본집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상당수의 주택이 부족한 바 이는 초가건축을 금지한 까닭도 있다고 하겠다. 초가건축의 금지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1922년 이전이며, 이는 초가 자체의 건축금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연재료(不燃材料)의 사용을 규정한 데 기인된 것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 한옥에 나타난 변화는 일반서민주택에 있어 가구(架構)의 양수(樑數)가 증가하여 과거 3량(樑)에서 5량(樑)으로 되었으나, 이는 실제 간살이가 넓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간살에 양반집의 동경으로 그 격식만 빌려온 것이었다.
처마에는 조선시대에 금지되었던 부연을 15평 정도의 서민주택에도 달기 시작하였으며, 장여와 소로받침 대신에 교창(交窓)을 달기 시작하였다. 또 납도리를 기둥 위에 얹을 때 나비장을 쓰던 것을 못으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 재래의 소로 대신에 이를 반쪽으로 갈라 쪽소로, 또는 딱지소로라 하여 안팎으로 갈라 붙이다가 바깥쪽만 붙여 치장하게 되었다. 또 굴도리가 ‘집장사집’에서 널리 쓰였고, 때로 반쪽으로 갈라 외양으로만 온통 굴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으니, 이도 굴도리집이 납도리집보다 고가였기 때문이다.
다음 처마길이가 점차 짧아짐으로써 처마에 홈통을 달기 시작하였으며, 들어열개의 분합도 미서기로 고치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높이가 높아지면서, 기단마무리에 금지되었던 잘 다듬은 장대석들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음 도료를 사용함으로써 목재에는 와니스를 칠하고, 홈통에는 페인트를 칠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오면 처마가 더 짧아지면서 함석으로 차양을 만들어 달고, 또 고급주택에서는 기단에 널보석이라 하여 재래의 디딤돌 대신에 기단을 따라 길게 디딤돌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기할 것은 1934년 6월 20일 반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으로서 같은해 11월 20일 나진부(羅津府)에 처음 적용되었고, 후일 서울의 돈암동 · 영등포 · 대현동 · 한남동 · 대방동 · 용두동 · 사근동 · 신당동 · 공덕동 · 청량리 등에 새로운 시가지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 신시가지는 대개 1937년부터 1944년도까지 토지구획정리를 하고 전래의 한옥과 개량주택들이 건축되었다.
재래의 한옥은 안암동의 예를 보면,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방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조선시대의 서민주택처럼 건넌방 · 대청 · 안방 · 부엌이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평면은 사실상 조선시대의 서민주택평면으로 단지 미서기로 된 중문을 만든 것만이 다를 뿐이다.
한편 개량주택들은 일본식 주택에 온돌방을 넣은 것으로, 현관 · 욕실 · 변소가 집 속으로 들어온 것이 전래의 한옥들과 큰 차이점이며, 마루방 대신에 다다미방을 둔 것은 일본식 주택에 단지 한옥의 온돌방을 첨가하여 기후환경에 적응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6 · 25동란까지의 5년간은 정부수립 이전의 혼란기, 정부수립 후의 숱한 난제의 해결에 급급한 나머지 항구적인 주택건축사업에 역점을 둘 수 없었고, 국민들 역시 자력으로 주택을 신축할 사정이 못 되었다.
이러한 사정에 주택난을 더 한층 가중하게 한 것은 월남민들과 만주 · 일본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의 수적 증가에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남한의 총인구는 1,589만명으로 추산되었으나 불과 일년 만에 약 400여만명의 인구가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청은 적산가옥(敵産家屋)과 일본인 소유였던 고급요정들을 숙소로 제공하려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여 결국 피난민들은 판자촌과 천막촌으로 주거문제를 해결, 이른바 해방촌(서울의 후암동 산 일대)과 같은 주거지가 생겨났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동란으로 주택난은 더욱 가중되었고, 특히 인구집중화현상이 심화되었던 서울에서는 1주택에 8명 정도가 기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46년 실시한 대한주택영단(大韓住宅營團)의 국민주택현상설계 1등당선안을 보면, 15평 규모의 서민주택으로 중앙에 거실을 두고 동서로 남향한 온돌방을, 그리고 북측에 현관과 부엌을 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분명 광복과 더불어 건축학을 정규교육 받은 세대들이 현대주택의 기능주의를 바탕으로 설계한 최소면적의 주택계획인 것을 알 수 있다.
전후의 주택난 해소책으로 정부는 민간구호계획(CRIK) · 한국재건단(UNKRA)등의 외국원조로 무상제공되는 건축자재로 긴급구호주택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조인 이후에는 100만호 주택건설안이 계획되었다.
1954년 4월 1일 산업은행이 발족되고 대한주택영단과 지방자치단체에 주택건설자금을 융자하여, 1956년까지 6,230호에 달하는 이른바 재건주택 · 복구주택 · 외인주택 등을 건설하였다.
1957년 이후에는 산업은행이 국제협동조합연합회(ICA) 대충자금과 귀재처리적립금(歸財處理積立金)에 의존하여 ICA자금을 융자, 이른바 ICA주택이라 부르는 소규모주택들을 서울의 부암동 · 화곡동 등 여러 곳에 건축하였다.
이들 ICA주택들은 1958년 민영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매년 표준설계도를 바꾸어감으로써 1963년대에는 100여종의 설계도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각지에 건축됨으로써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들 주택의 평면도를 보면 점차 형태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실의 배치를 가급적 남향으로, 방은 온돌, 거실은 마루로 하고 부엌과 일반실과의 고저차를 없앰으로써 주부의 노력을 경감시켰다.
또 거실과 부엌을 한 공간으로 한 리빙키친형(living kitchen型), 거실과 식당을 한 공간으로 한 리빙다이닝형(living dining型) 등을 도입하여 입식생활을 권장하는 형도 나타났다.
구조는 벽체구조로 시멘트벽돌, 벽돌 등을 썼고, 기초는 콘크리트, 지붕은 목조트러스에 왜기와나 슬레이트를 사용하였다. 특히 개구부를 넓게 잡은 거실 창호 위에는 철근콘크리트보로 보강하였다.
이러한 주택건축의 변화는 보건사회부가 주최한 전국주택현상설계공모에서도 잘 나타난다. 제1회의 서민주택 1등당선안은 15평 규모로 실들이 모두 남향이며, 특히 부엌 앞, 남향으로 작은 마루방을 두어, 재봉틀을 놓은 가사실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현상공고에 발표된 설계조건으로 가족 5인, 대지 크기 40평, 건평 9평(변소는 옥내에 설치, 부속건물은 건평에 포함하지 않음.) 등을 전제한 바 이는 조선시대에 형성된 대가족제도에서 부부중심의 핵가족제도로 지향하여 가려는 정부의 의지를 잘 나타내는 것이었다.
또 구조상 지붕과 벽체에는 내화재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조건은 과거 목조로 된 한식주택의 결점인 방재문제를 개선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같이 현상공모된 농촌주택설계(농촌형 자조주택)는 조건으로 가족 6인, 대지 100평, 건평 9평, 영농상대 논 1,000평, 밭 600평, 소 1두, 돼지 2마리, 닭 10마리로, 변소는 옥외에 설치할 것이며 주건물 9평에 포함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지붕 및 벽체는 내화자재를 이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 현상의 1등당선안에서는 중앙에 마루방과 부엌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둔 평면으로, 부엌바닥은 앞 남쪽으로 붙은 마루방보다 한단 낮게 되어 있어, 아직까지 재래 한옥의 부엌과 같게 한 것으로, 이는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농촌주택현상설계는 농촌주택개량의 의지는 보여주었지만 많은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다음 도시에는 상가주택(商街住宅)이 도시미관과 전후복구에 주안을 두어 1958년부터 건축되었다. 이들은 종로 · 을지로 · 등 중심가로에 1 · 2층은 상가와 사무실용으로, 3 · 4층은 주택으로 건축되었다. 또는 4 · 5층 규모로 제일 위층을 주택으로, 옥상을 장독대와 마당으로 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공해문제와 업무시설가의 폭등으로 점차 사무실로 바뀌게 되었다.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가 주도하였던 국민주택들을 제외하고, 건축가들이 건축주의 요구에 응하여 건축한 단독주택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건축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이후에 다량 건축되었다.
예를 들면, 1956년 김순하(金舜河)가 설계한 집을 보면 건평 66.8평의 화강석 벽체의 고급주택으로, 마루와 복도로 안방과 사랑방을 접속시킴으로써 전통적인 한식주택에서의 안채와 사랑채의 기능을 접속시킨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연립주택이 우리 나라에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이후 철도건설에 종사하던 노무자들을 위한 합숙소와 제2차 세계대전시 군수공장과 무기고를 설립, 주민들을 이주시키면서 집단수용을 위하여 만든 것, 또는 일본산업체 종사자들의 주거를 위하여 2 · 4 · 6호(戶) 연립으로 건축하였다.
또 1955년에는 한미재단(韓美財團) 후원으로 서울시 서대문구 행촌동 언덕에 4호 · 6호 · 12호의 연립으로 총 52세대분이 건축되었다. 이 연립은 각 호마다 앞에 작은 마당을 두고 남향한 현관을 들어서면 남향의 온돌방이 있고, 이 방 북쪽으로 부엌과 화장실 · 계단이 배치되고, 2층 남향으로 마루로 된 거실과 북쪽에 온돌방을 둔 집중적인 평면을 이루고 있다.
연립주택보다 규모가 더 큰 집단주거인 아파트 건축 역시 일본인들에 의하여 ‘요(療)’라는 명칭으로 건축된 바 경성전력주식회사의 장진료는 ㄴ자형 평면으로 중앙복도식으로 2층 1동, 건평 490평, 60호를 수용한 연와조(鍊瓦造)였다.
1945년 이후의 아파트 건축의 시작은 1958년도의 종암아파트로서 각 세대 17.3평, 4층 4동, 총 세대수 152세대가 건축되었다.
이 아파트의 평면은 각 세대가 편복도를 통하여 현관으로 들어서며, 전면에 발코니를 두고, 거실과 온돌방을 전면에 배치하고, 후면에 부엌 · 화장실 · 현관 ·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1959년에 건축된 개명(開明) 아파트는 4층 1동, 총 75세대로 각 세대는 13.3평이었다.
이러한 아파트 건축은 1962년 대한주택공사의 마포아파트(450세대, 6층 6동, 건평 세대당 17.2평)부터 본격적인 대단위 아파트건축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편 주택공사의 주택문제연구소에서는 시험주택들로서 이시돌식주택(예관수 · 성익환설계), 에밀레하우스(조자룡설계), 연립주택, P.S.C.조립식주택, 아성벽돌식주택들이 수유동에 시범적으로 지어졌다.
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단지에 이어 1965년에는 화곡동에 12만평의 대단위 주택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1차 택지조성사업이 완료된 같은해 12월에 일반인들에게 분양되었는데, 이 10만화곡단지는 단순한 주택지만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활여건시설, 학교, 상가, 유치원, 동사무소, 파출소 등을 사전에 계획한 것이었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7년 한해 전해인 1966년부터 1971년 사이에 한강아파트단지를 84,716평 조성하여 공무원아파트 1,312호, 맨션아파트 700호, 외인아파트 500호, 민영아파트 748호 등 총 3,260호가 건설되었다. 이들 아파트들은 5층짜리로서, 특히 맨션아파트는 중온수 보일러를 사용하여 난방을 한 중산층아파트였다.
그러나 종묘 앞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도심 등에서는 도심재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세운상가아파트를 필두로 낙원동의 낙원상가아파트, 대왕상가아파트등의 복합건물들이 건립되었으며, 주택공사는 주로 중소득층을 위한 주택공급에 힘썼고, 저소득층을 위한 서민주택은 지방자치단체가 맡아 건설 공급하였다.
서울의 시영아파트는 1969년까지 406동 1만5840세대가 건설되었는데, 이들은 낙산 · 와우산 등 고지대에 1가구당 8∼12평 규모의 작은 아파트를 무리하게 건립한 결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 33명의 귀한 인명을 앗아갔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의 제3차경제개발계획 기간에는 한강 이남인 반포동 일대에 총 167,631평 단지를 조성하여 22평형으로부터 64평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형의 아파트를 건립하였는데, 모두 5층이나, 64평형은 6층으로 1세대마다 복층으로 하였고, 주거지 50%, 도로 31%, 상가 5%, 공원놀이터 5%, 학교 7%의 비율로 조성되어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었다.
1974년에는 서울시가 잠실지구에 새로운 잠실아파트단지 건설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계획인구 10만명으로, 폭 50m 도로를 축으로 하여, 25∼30m 도로에 의하여 구획하여 블록마다 출입이 자유로우면서도 단지의 출입구를 적게하여 관리를 용이하게 하였다.
또 남향 선호의 一자형배치를 지양하고 口자형배치를 하여 중정과 녹지공간을 확보, 공원과 어린이놀이터를 마련하였으며, 근린주구단위마다 초등학교 · 상가 · 동사무소 · 파출소 등을 두었다.
1977년부터 1981년 제4차경제개발계획기간에는 총 11만호로, 민간부분 62만호, 공공부문 49만호가 건설되었다. 공공부문의 것으로 화곡동단지, 구미공단아파트, 이리 재해민아파트, 반포 2 · 3단지, 한남시민아파트, 둔촌아파트단지 등이 있었으며, 민간부분으로는 삼익 · 우성 · 극동이 참여한 서초지구 아파트단지, 현대의 압구정동 아파트단지, 삼호의 방배동 아파트단지, 선경의 워커힐아파트단지 등이 있다.
1980년 12월에 정부에서는 도시안에 대규모의 택지조성이 불가능한 것을 인식하여 도시주변에 신규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택지개발촉진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법의 제정으로 광명철산지구, 개포지구, 고덕지구, 목동지구, 그리고 상계신시가지가 조성될 수 있었다. 대한주택공사는 1979년∼1983년에 걸쳐 과천신도시를 개발하였다. 총면적 108.5ha의 넓은 터에 가구수 13,522세대를 공급하여 인구 약5만명의 신도시를 개발하여, 모두 11개단지에 주로 5층짜리 저층 아파트를 건설하고, 중앙지에 가까운 5단지와 8단지에는 12층 고층아파트를 건립하였다.
제5차경제개발계획기간인 1982년부터 1986년에는 민간부분 54만호, 공공부문 55만호, 총 109만호가 건설되었다. 특히 1983년봄 서울시는 강서구 목동 · 신정동과 구로구 고척동 일원의 약 4,300,000㎡에 23,500호를 공급, 110,000인을 1986년까지 정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 목동 신시가지에 건립된 아파트의 특징으로는 1층 아파트가구는 개인형 정원을 제공해주는 접지형(接地形) 개념과 3세대가 거주할수 있는 동거(同居) 개념에 의한 계획안들이 현상설계를 통해서 실현된 것이다.
또 1983년에는 아시아선수촌 국제현상설계가 있었고, 1등당선된 조성룡안에 의하여 아파트단지가 건설되어, 1988년 황일인 · 우규승이 설계한 올림픽선수촌 건설로 이어졌다. 특히 88올림픽선수촌의 아파트에서는 반포아파트 94동과 95동에서 이미 이루어졌든 복층형이 다시 채택되었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100만평 부지에 40,224호의 주거단지를 계획한 상계신시가지가 개발되었다. 이 신시가지에서는 “설계지구”라는 개념에 의하여 개별단지의 폐쇄성을 없애는 계획적 조치가 이루어 졌다.
1980년대에는 다세대주택의 제도화가 있었다. 다세대주택은 동거개념에 의한 주택형으로, 1984년 12월 31일 법률 제3766호로 건축법개정과, 1985년 8월 16일의 새로운 시행령으로 제도화 된 것이다. 또 이른바 “빌라”라고 하는 대형화되고 고급내장재를 쓴 고급연립주택이 하나의 주거형태로 등장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1987년부터 1991년에 이르는 제6차경제개발계획기간은 1980년대 말부터 맞이한 경제호황이 1988년말에 절정에 달하여 땅값과 주택가격이 급등하게 되었다.
때마침 1988년 출범한 제6공화국 정부는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등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1988년 4월 주택가격 안정을 위하여 1992년을 목표연도로 한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을 공포하고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또 택지개발에 따른 이익을 그 지역에 환원한다는 방침에 따라 서울시, 대구시에서 지방공사가 설립되고, 지자체에서도 공영개발사업단이 설립되어 개발에 힘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도권 5개 신도시, 성남 분당, 고양 일산, 안양 평촌, 부천 중동, 군포 산본에 30만호의 주거단지들이 개발되었으며, 택지공급의 확대로 1987년 24만 4301호에서 1988년 31만 6570호, 1989년 46만 2159호, 1990년 75만 378호로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거단지의 고밀화와 15층에 머물던 아파트가 20∼30층으로 초고층화를 초래함으로써 주거단지 환경의 질적 저하를 가져 왔고, 부실시공으로 많은 문제점들을 만들게 되었다.
한편 1993년 노후아파트 재건축 허용기준이 완화됨으로써 민간건설협체가 참여하는 합동재개발사업이 확대되어 1994년 7월 현재 서울시에만 237개의 재건축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개발이익 극대화를 꾀함으로써 무분별한 재개발사업추진을 추진하여, 건축물의 수명단축과 고층화에 의한 도시경관 파괴 등을 가져와 도시환경을 악화시키게 되었다.
또 지방 소도시에서는 신규택지개발과 함께 대부분 고층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자연경관 파괴의 우를 범하게 되었다. 앞으로 맞이하는 21세기에는 보다 환경친화적인 주택건설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함으로써 주거문화를 보다 질적으로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경기도 지방의 서민 가옥 중에는 각 한 칸씩의 부엌과 방으로 이루어진 일자 2칸집이나, 부엌에 안방과 건넌방이 이어 달리고 방 앞에 툇마루를 붙인 3칸툇집이 없지 않으나, 이보다 보편적인 것은 ㄱ평면으로 구성된 ㄱ자집이라고 하겠다.
한편 중류 가옥에는 ㄷ자집이 제일 많으며, 상류 가옥이 되면 튼ㅁ자집이나 ㅁ자집이 주류를 이룬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용유도(龍遊島)에도 ㄷ자집과 튼ㅁ자집이 주류를 이루며, 이와 같은 사정은 같은 군의 덕적도도 비슷하다.
그러나 같은 옹진군에 속하면서도 연평도 · 백령도 · 대청도 · 소청동 일대에는 겹집이 압도적으로 분포하는 바 [그림 4] 이들은 황해도 겹집의 영향을 입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경기도의 평야 및 도서에는 ㄱ자집 · ㄷ자집 · ㅁ자집이 압도적으로 많고, 일부 산간과 도서지방에는 田자형 겹집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5]의 집(이천시 백사면 도림리)은 이 지방의 전형적인 ㄱ자집이다. 이 집의 평면구성을 보면 대청이 2칸에 이르고, 안방과 건넌방에도 퇴를 붙이는 등 마루의 기능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가족들은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생활한다. 마루에서 식사를 하고, 손님을 접대하며, 제사를 올리고, 혼인식도 거행한다. 때로 마루에서 잠을 자며, 부모의 상청(喪廳)도 이곳에 모신다.
[그림 6]의 집(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리)은 앞의 집과 같은 ㄱ자집이나 부엌 남쪽에 부속 공간을 두고 부엌 서쪽을 반 칸 늘린 점이 주목된다.
이 섬에서는 부엌 남쪽에 광을 두기도 하나(이때에는 광과 부엌 사이가 벽으로 차단됨), 이 집처럼 두 공간을 통간(通間)으로 하고, 한 끝에 퇴를 붙여 찬장 따위를 얹어 두는 것이 보통이다.
이 퇴를 ‘광마루’라고 부르고, 문이 따로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별개의 공간으로 구획되었던 듯하나 부엌과 광이 개방된 예가 더 많아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대청의 후면을 벽으로 차단하고 전면에도 널문을 붙인 것으로 미루어 이 공간의 주요 기능이 살림살이나 곡물 등을 갈무리하는 데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 7]의 집(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상리)은 ㄱ자형 안채에 一자형 사랑채가 연결되어 평면은 ㄷ자를 이루었다. 안채가 겹집형식으로 되고 대청이 4칸에 이른다.
앞의 집처럼 부엌과 대청 사이에 외짝여닫이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대청 전면의 네 짝 세살문 오른쪽에도 벽을 치고 외짝문을 달았다. 이 때문에 대청의 전면이 좁아지고 필요한 때 앞을 개방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대청이 거주 공간으로보다는 수장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림 8]의 집(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은 이 지방의 전형적인 중류 가옥으로, ㄱ자형 안채에 같은 형의 바깥채가 마주 세워져 이른바 튼ㅁ자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평면의 집은 서울 주변인 고양시 · 광주시 ·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안채는 겹집양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주간(柱間)이 바깥채보다 1m 가량 길다. 대청은 4칸에 이르며, 안방과 사랑방 전면에도 퇴를 달았다.
대청과 건넌방 전면의 문은 4분합 유리문이며, 나머지 문들도 대부분 미닫이로 되었는 바 이것은 이 집이 비교적 근래(1936년)에 세워진 때문일 것이다.
바깥채 전면의 광 · 대문 · 사랑방의 배치는 이 지방의 전형적인 평면구성법으로 대문과 사랑은 거의 언제나 한 채의 건물에 나란히 배치되며, 대문채가 단 2칸일 때도 다른 한 칸에는 반드시 사랑방이 이어 달린다.
또 사랑방 전면에 퇴가 있어서 외래객과 주인과의 접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점도 이 지방의 가옥이 지닌 특징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림 9]의 집(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은 이른바 또아리집이다. 사랑부엌과 건넌방 사이가 터져 있기는 하나 짚을 덮은 지붕이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또아리의 모양이 완연하다.
이 집의 안채는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대청이 배치되고, 부엌이 안방 남쪽으로 이어달린 점에서는 경기도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셈이나, 사랑방 전면에 퇴를 붙이지 않고 벽으로 차단한 점에서는 황해도의 또아리집을 연상시킨다.
[그림 10]의 집은 개풍군 및 장단군 일대에 분포하는 또아리집으로, 이 지방 농촌의 전형적인 상류 가옥이라고 하겠다. 이 집은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바깥채가 마주 세워지고, 이 두 건물을 대문이 연결해 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대문과 사랑이 가옥의 서쪽에 배치된 것은 지형에 따르려는 의도의 결과일 것이다. 대청 뒤에 문이 달리고 전면이 개방되었으며, 안방과 사랑방 전면에 툇마루가 배치되는 등 이 지방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사랑부엌과 안뜰 사이를 벽으로 차단한 것은 외부인이나 아랫사람들의 눈길이 안채의 중요부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또 아랫사랑방에 안채로 통하는 문을 달아 놓지 않고 윗사랑방이나 대문을 통해서 드나들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큰 대문은 안채에서 비껴 있어서 이에 대해 배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농가라고 해도 격식을 차리고 사는 상류층에서는 내외법의 관습을 지키려는 의도가 매우 강하였다.
이 집에는 몸채 곁에 외양간과 헛간 등이 부속된 一자집이 따로 있으나, 경우에 따라 이러한 부속 공간들은 몸채에 배치되기도 한다. 이러한 또아리집에는 안뜰과 뒤뜰이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며, 아랫방이나 윗방에는 골방이나 벽장이 부속되고, 겨울철에는 아랫방과 윗방 사이를 장지로 차단하며, 윗방은 수장 공간으로 쓴다.
또 평안도나 황해도의 또아리집에는 대청이 없으나, 이 지방에는 반드시 대청이 배치된다. 따라서 이러한 또아리집은 대청이 있는 ㄱ자집과 그 분포가 거의 일치한다.
강원도에는 우리 나라의 거대한 산맥 중 하나인 태백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내려 있어 대부분이 산간지대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가옥도 산간지대 특유의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강원도의 가옥이 지닌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평면의 구성이 북부지역 가옥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田자형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산간지대에만 분포하는 귀틀집과 이에 시설된 고콜이나 ‘화투’와 같은 원시적인 잔존물이 존재하며, 지붕을 너와 · 굴피 · 새와 같은 특수한 재료로 덮은 점을 덧붙일 수 있다.
귀틀집이나 고콜 · 화투, 그리고 너와나 굴피 · 새 등은 이 지역 특유의 시설이나 재료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것들은 산간지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문화 요소이고, 더구나 최근까지 강원도에만 남아 있었으므로 이들을 이 지역 가옥의 한 특징으로 다루어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귀틀집은 적당한 굵기의 통나무 좌우 양쪽을 도끼로 우묵하게 파고 20여 개의 나무를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 벽체를 삼은 집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벌어진 틈은 진흙으로 메운다.
귀틀집은 벽이 통나무로 되어서 많은 적설량에도 견딜 수 있고, 방안의 온기를 유지하는 데도 유리하며, 짓는 일도 간편하여 산간지대의 화전민들이 매우 오래 전부터 이용해 왔다.
그런데 귀틀집의 평면은 구조상 [그림 11]에서 보는 것과 같이 一자형을 이루게 되며, 규모에서도 2칸 이상의 집을 짓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만을 귀틀구조로 하고 부엌과 외양간은 널벽이나 토벽으로 마감하는 것이 보통이다.
방의 천장은 평천장으로 판판하게 다듬은 나무 서너 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늘어놓고, 이에 의지하여 널쪽이나 잔 나뭇가지의 산자를 촘촘하게 편 다음 그 위에 흙을 발라 메웠다.
따라서 맞배지붕과 천장 사이의 합각에는 공간이 생기며, 이곳에 농기구 등을 넣어 두기도 한다. 강원도지역의 가옥에는 일반적으로 외양간이 부엌에 부속된다. 이것은 가축을 추위와 산짐승으로부터 보호하고 사람이 돌보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의 결과이다.
[그림 12]의 가옥은 일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나 측면이 확장되어 사랑방 뒤에 도장방이 생겨나고, 안방 전면에 퇴가 놓였으며, 외양간 귀퉁이를 나뭇간으로 쓰는 등 같은 평면형인 [그림 11]의 가옥에 비해 비교적 여유 있는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 앞의 집에서는 디딜방아가 마당 옆의 노천에 시설되어 있으나, 이 집에서는 변소 뒤쪽에 방앗간을 붙여 놓았으며, 부엌 북벽에도 문을 달아서 감자움이나 방앗간으로 출입하는 것을 간편하게 하였다.
평면구성상으로 볼 때 [그림 11]의 가옥이 강원도 산간지대의 전형적인 서민가옥이라고 한다면, 이 집은 산간을 벗어난 곳의 서민가옥이라고 할 것이다.
[그림 13]의 가옥은 이 지방 가옥의 전형적인 평면으로 구성되었으며, 방들이 田자형으로 배치되고, 부엌 안에 외양간이 부속된 점으로 미루어 강원도의 가옥이 북부형인 함경도 가옥의 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고 하겠다. 실제로 정주간이 생략되었을 뿐 나머지는 함경도의 가옥 그대로이다.
이처럼 강원도와 함경도의 가옥이 상통하는 것은 두 지역이 모두 전형적인 산간지대로 이루어지고, 태백산맥으로 인해 강원도에서는 내륙평야보다도 함경도 쪽에서 문화적인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평창군 등지에는 네 개의 방 북쪽에 두 개의 방을 더 배치하고 전면과 북쪽 측면에 퇴를 놓은 집이 산재하며, 횡성 등지에서는 아랫사랑방 자리에 널을 깔아 대청으로 쓰기도 한다.
[그림 14]의 가옥평면은 앞의 가옥과 흡사하나 방과 방 사이에 좁은 마루를 놓아 통로로 삼고, 사랑방 전면에 퇴를 붙인 점이 다르다.
특히 사랑방 전면의 퇴는 이 지방의 가옥에서도 마루가 평면의 일부를 구성하는 일면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보기라고 하겠다. 이 집에서는 아랫사랑방에 안노인이, 윗사랑방에 바깥노인이 기거하며, 건넌방을 장년의 아들 내외가 쓰고 뒷방은 공부방으로 이용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위아래의 사랑방을 장지로 막고, 변소의 한쪽을 막아 여성 전용으로 한 점을 통해 내륙평야지대 상류 가옥의 생활관습 일부가 반영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림 15]의 가옥은 강원도 북부인 평강군과 이천군 등지에 분포한다. 다른 집들에 비해 한 용마루 아래에 방들이 세 줄로 배치되어 복잡한 듯하나 역시 田자형 평면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집은 12칸으로 되어 있으나 삼척시 일대에는 외양간과 봉당의 일부, 그리고 고방이 생략된 9칸집이 산재한다.
이 집의 평면을 살펴보면 중앙에 대청이 배치되고, 전면에 봉당이 생겨난 점 등으로 미루어 평안도와 황해도지방의 영향이 매우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강원도의 기본 평면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들 지방의 안채와 바깥채가 한 지붕 안에 포함된 특이한 평면을 구성했다고 하겠다.
평면구성상의 문제 외에 강원도 가옥이 지닌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다른 지역에 비해 부엌이 매우 넓다는 점이다. 이것은 추운 겨울에 이곳을 작업장으로 이용해야 하는 사정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논농사가 적기 때문에 내륙평야지대의 곳간과 같은 곡물의 수장 공간이 따로 없는 점이다. 밭곡식인 고구마나 감자 등은 움을 파서 갈무리하거나 방 윗목에 수수깡으로 통가리를 만들고 이 안에 두기도 한다.
셋째는 오지가 매우 귀해서 나무로 만든 김칫독이나 싸리로 엮은 채독을 사용하며, 굴뚝도 큰 참나무를 길이로 쪼개고 가운데를 파낸 다음 다시 맞붙여서 사용하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학자는 삼척시 도계읍 신리와 원덕면 동활리에 이른바 측입민가(側入民家)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이 집은 가옥의 전면이 지붕의 용마루와 평행하는 위치에 오지 않고 수직을 이루며, 따라서 출입을 위한 대문이 측벽에 설치된 특이한 가옥이다. 이러한 측입민가는 일본에도 있는데, 그곳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충청도의 내륙이나 도서지역의 가옥은 경기도지방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으며, 다만 소백산맥 연변의 충청북도 산간지대에서 북부형 겹집이 산견될 뿐이다.
내륙지방의 가옥으로는 충청남도에서 민속마을로 지정한 아산군 송악면 외암리의 가옥을, 그리고 도서지방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의 가옥을 전형으로 삼아 설명한다.
평면유형에 있어서는 一자집과 ㄱ자집이 주류를 이루며, ㅁ형 집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뒤의 집은 ㄱ자집에서 살림형편이 나아짐에 따라 바깥채를 따로 세워서 생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결국 이곳 가옥의 주평면은 ㄱ자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림 16]의 집(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은 방 전면과 측면에는 퇴를 달아 주거공간의 확대를 꾀하였으며, 윗방 측면의 위아래에 방과 광을 배치하여 평면구성이 매우 짜임새 있게 이루어졌다. 이 작은방에는 곡식항아리나 장기보관용 음식물 등을 두어 다른 지방의 도장처럼 이용한다. 한편 퇴 사이의 광은 일종의 곳간으로 나락을 갈무리한다.
이 광의 벽은 널벽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쪽널을 양 설주 사이에 한 장씩 끼워 넣어서 문으로 삼는다. 안채의 모서리에 설치되는 이 광이야말로 이 지방의 가옥이 지니는 특징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골방을 반으로 나누지 않고 아랫방의 주인공이 전용하도록 한 것은 이 집의 살림권이 아랫방에서 기거하는 이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림 17]의 집(당진군 석문면 장고항리)은 이 지방에서는 중상류에 속하는 가옥으로 안채는 一자형이나 바깥채는 ㄱ자평면으로 구성되었다.
안방 후면에는 흔히 골방을 두지만, 이 집에서처럼 대청과 건넌방 뒤쪽에도 골방을 배치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 부엌은 물론 안방도 다른 공간에 비하여 매우 너른 편이며, 다락 또한 부엌 면적의 반을 차지한다. 이로써 안방 주인공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락의 출입문을 골방에 붙여서 이 공간이 외부인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바깥채에는 두 곳에 문을 달았는 바 윗사랑대문과 아랫사랑대문이 그것이다. 이것은 실용성보다 상하의 계층의식이 작용한 결과로서 윗사랑대문은 주인을 비롯한 상류층 사람들이, 아랫사랑대문은 일꾼들이 이용하였다.
문의 이름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실제로 바깥채는 상류층의 윗사랑과 서민층의 아랫사랑으로 2분되는 셈이다. 그리고 아랫사랑방의 뒷벽에 문을 내지 않은 것이나 아랫사랑의 대문을 앞뒤 두 곳에 붙인 것도 아랫사람들이 기거하는 아랫사랑을 안채나 윗사랑에서 격리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림 18]의 가옥(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은 충청도에 분포하는 전형적인 田자형 겹집이다. 이 집의 평면구성은 겹집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봉당과 부엌, 그리고 안마당 사이의 일부와 사랑방과 대청 사이에 벽을 세운 것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로 인하여 봉당의 성격과 기능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적어도 의식의 세계에서는 남성의 공간인 사랑방과 여성의 공간인 안채가 별개의 세계로 나뉘게 된 때문이다.
이 한 칸 길이에 지나지 않는 벽에는 전통적인 생활규범상으로 볼 때 실로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하겠다. 산간지대의 겹집은 건물의 규모나 평면구조상 내외의 관습을 지킨다는 것이 무리한 일이지만, 이 집에서는 형식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도록 배려하였다. 이러한 면이야말로 이 지방 서민가옥이 지닌 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방의 겹집 중에는 마루를 윗방 전면에까지 이어붙이고, 이에 2칸의 사랑방을 남북으로 배치한 비교적 큰 규모의 집도 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안방과 윗방을 통간으로 하거나 마루를 봉당에까지 시설하기도 한다.
한편 서민가옥에서는 안방 전면을 봉당 그대로 두는 일이 많다. 이러한 겹집은 충청북도의 단양군 · 제천시 · 충주시 · 괴산군 일대에 분포한다. 태백산맥을 끼고 내려온 겹집의 큰 줄기는 경상북도로 뻗어가고, 다른 곁가지가 소백산맥으로 흘러들어온 셈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지방의 서민가옥은 부엌과 방으로 이루어진 2칸이나 부엌에 방이 둘 달린 3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옥의 방 전면은 토방 그대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곳에 따라서는 평상을 붙여서 퇴로 쓰기도 한다.
[그림 19]의 집(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은 앞에서 설명한 유형에 속하는 가옥이나, 큰방 앞에 퇴를 붙이고 뒤쪽에 부엌방을 두어 매우 오밀조밀한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엌방은 이러한 서민가옥뿐만 아니라 중류나 상류가옥에도 보이는 공간으로 이 지방의 가옥이 지닌 특징의 하나이다. 이 방은 전라북도의 부안군과 고창군의 해안 및 장수군의 산서면, 남원군의 수지면, 그리고 순창읍의 내륙지대에도 분포한다.
한편 전라남도에서는 서해도서인 신안군의 여러 섬과 영광군 · 영암군 · 장흥군 · 보성군과 남해도서인 진도군 · 완도군 · 고흥군을 비롯하여 나주군과 담양군과 같은 내륙에도 보이나 산간지대인 구례군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 이 방은 경상도지방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아 매우 대조를 이룬다.
[그림 20]의 가옥(전라북도 정읍시)은 큰방의 앞뒤와 작은방 일부에 퇴가 붙고 작은방 뒤쪽에 도장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평면형은 전라도지방 서민가옥의 표준형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경제적인 여력이 생겨서 도장이나 대문이 부속된 바깥채가 따로 세워지면 도장의 벽을 터서 통간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 큰방이 뒤쪽의 퇴에까지 연결되는 대신 전면의 퇴가 부엌과 작은방 사이에 배치되며, 부엌방도 이 퇴를 통해서 드나들도록 된 집도 흔하다.
전라남도의 동남쪽인 장흥군 · 보성군 · 강진군 · 고흥군 등지의 초가지붕의 용마루에는 통대나 장목을 가로넣는 특이한 풍습이 있으며, 용마루의 좌우 양끝이나 나무가 이어지는 이음새에 다른 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지기’라는 것을 꽂아둔다.
이것은 이엉 한 단 가량을 새끼로 단단히 묶고, 낫으로 반듯하게 잘라서 수냉이(뿌리) 쪽이 하늘을 향하도록 거꾸로 세운 것이다.
따라서 짚의 긴 너풀이 용마루 밑으로 퍼져 들어가도록 하고, 이 위에 용마루를 놓아 짓누른다. 한편 강진군 일대에서는 짚 한 묶음을 빗질하여 일으켜 세운 뒤에 중간 부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묶어맨 것을 세우기도 하는데, 그 모양은 먼지떨이와 비슷하다.
[그림 21]의 가옥(전라남도 완도군)은 방과 방 사이에 부엌이 배치된 특이한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가옥은 전라남도의 완도 · 청산도 · 진도 · 안좌도 · 임자도 등지의 도서지역과 이에 인접한 장흥군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전라북도 고창군의 해안지역에 산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것을 전라도의 도서나 해안지역의 특수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라남도의 청산도에서는 큰방 뒤쪽에 골방을 붙이고(이를 뒷방이라고 한다), 이곳에 감자나 고구마 등의 밭곡식을 갈무리하며, 작은방 뒤에도 같은 크기만큼 담을 두르고 이곳을 김치광으로 이용한다.
[그림 22]의 가옥(전라북도 부안군)은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나 작은방 전면의 부엌은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근년에 붙인 것이며, 원래는 一자형의 평면이었다. 부엌 뒤쪽에 앞에서 설명한 부엌방이 부속되고, 윗방 곁에 작은방을 따로 마련하였으며, 이 방 뒤에 광을 두었다.
이 공간은 방이라고는 하지만 바닥은 흙바닥이며 어구 등을 두는 헛간으로 쓰며, 윗방에는 곡식이 든 항아리 · 독 · 비료 · 가마니 등을 두고 성주동이도 있다. 또 이 집에는 돼지우리 · 변소 · 헛간으로 구성된 바깥채가 대문 근처에 따로 세워졌다.
[그림 23]의 가옥(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은 부엌 전면에 모방이 있고, 대청 측면에 ‘마래’(마리 또는 말래라고도 함)라는 공간이 배치된 점이 눈을 끈다.
이 집 마래의 바닥은 흙바닥이나 이곳에 널을 깔아놓은 경우에도 똑같이 부른다. 따라서 마래라는 말은 단지 이 공간의 명칭일 뿐이며 내부의 시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마래는 조상의 위패를 넣은 감실(龕室)을 두고, 가정의 으뜸가는 신인 성주신을 모시는 점에 있어서는 내륙의 대청과 기능이 비슷하다 하겠으나, 사람이 머무는 일이 없고 곡식이 든 항아리나 독 또는 어구 등을 두는 점으로 미루어 헛간이나 도장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부엌의 전면과 모방 사이에는 작은 마루가 설치되어 있는 바 이것은 근래에 붙인 것으로 원래는 이곳에 부엌의 출입문이 있었다.
부엌의 전면에 마루를 베풀고, 출입문을 측벽에 붙이는 이와 같은 경향은 진도나 완도 등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평면을 지닌 가옥이 분포하는 곳에서는 중부에서처럼 대청의 옆에 방을 배치하지 않고, [그림 23]에서와 같이 부엌 전면에 모방을 두며, 이것으로서도 부족할 경우에는 다시 모방 옆에 방을 붙여 짓는(이를 갓방이라고 함)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서민가옥의 평면은 부엌 · 큰방 · 마래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며, 부엌 앞에 모방을 갖춘 집은 중류가옥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상류가옥은 이에 갓방이 더 있을 뿐이다.
한편 전라북도의 어청도에서는 부엌 전면, 또는 이에서 ㄱ자로 꺾어진 자리에 모방 대신 광을 두고 수장공간으로 이용한다. 이 지방 상류가옥의 안채의 평면은 [그림 24](전라북도 남원시)와 [그림 25](전라남도 나주시)에서 보는 것과 같이 一자형이나 ㄷ자형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ㄷ자형의 안채 중에는 [그림 24]처럼 양날개에 필요한 공간을 적당히 배치하는 유형과 양쪽에 부엌을 달아서 집의 평면이 거의 좌우대칭을 이루는 유형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날개의 한 쪽이나 두 쪽 모두를 누마루로 꾸미고(공루라고 함) 아래층을 부엌으로 쓴다. 공루는 다락처럼 이용하나 여름에는 이곳에서 사람이 잠을 자기도 한다.
[그림 24]의 가옥에서는 대청 우측 후면에 도장을 배치하고 작은방을 앞으로 끌어내었다. 이로 인하여 작은방의 채광과 보온이 한층 유리해지기는 하였으나, 이 방에서 기거하는 며느리에게 부속된 공간은 단지 공루에 한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전라북도의 남원군 일대에서는 상류 가옥뿐만 아니라 4칸겹집의 중류 가옥에서도 이처럼 작은방을 앞쪽에 배치하며, 이때에는 ㄱ자형 정면을 이루는 일이 많다.
이 지방의 상류 가옥 안채는 겹집으로 이룩되는 일이 많은데 [그림 25]는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이 집에서는 2칸의 큰방이 남북으로 배치되었으나, 이를 동서방향에 두고 뒤쪽에 골방을 붙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작은방만은 남북방향으로 두는 것이 원칙이다. 이 건물은 방보다도 마루가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높으며, 이와 같은 경향은 전라남도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짙게 나타난다.
평면 구성상의 특징으로는 4칸대청 중의 한 칸을 도장으로 꾸미고, 건넌방 측면의 퇴의 일부에 엽연초를 갈무리하는 담배광을 붙였으며, 부엌 후면에 조리한 음식을 차리거나 만든 반찬 등을 넣어두는 밥청과 김치광 등을 따로 마련한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전라남도의 상류가옥에는 김치광을 부엌 한쪽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으며, 젓광이라고 하여 젓갈독이나 단지를 갈무리하는 공간을 따로 두기도 한다. 안채와는 달리 상류가옥의 사랑채는 대부분 겹집형식의 一자형 평면으로 구성된다.
[그림 26]의 가옥(전라남도 영광군) 사랑채에는 침방이 따로 마련되었으며, 이 방은 안채로 드나드는 통로의 구실도 겸한다. 전라도의 상류가옥에는 침방을 따로 갖춘 집이 적지 않다.
비밀실은 골방에서 출입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 방에는 언제나 여러 가지 물품 또는 이부자리 등을 쌓아 두므로 외부 사람은 좀처럼 비밀실의 존재를 알기 어렵다. 침방 퇴끝의 작은 공간에는 마구 등을 두었다.
건물의 앞뒤는 물론 좌우 측면에도 퇴를 둘러서 마루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이 지방의 평야지대에서는 곡식을 갈무리하는 곳간을 따로 세우는 일이 많으며, 특히 순창군 · 담양군 등지에는 3칸 규모의 건물도 적지 않다.
곳간의 바닥에는 마루를 깔며 벽은 모두 널벽이다. 사당을 따로 갖추지 못한 집에서는 대청 뒷벽 상부에 벽장을 꾸미고, 이곳에 위패와 제기 등을 두는데 이를 사당벽장이라고 한다.
또 안채 대청의 한쪽에 벽을 치고 사당으로 쓰기도 하며, 안채 전면의 툇마루 한끝에 나무궤를 짜서 달고 위패를 그 안에 두는 일도 있다.
전라남도지방 사람들은 장독에 대하여 유별난 관념을 지니고 있다. 장광 또는 장고방이라고 하여 주위에 담을 두르며, 담양 등지에서는 출입문을 따로 붙이기까지 하며, 특히 영암에서는 이곳에 집안의 으뜸되는 신인 성주를 모신다.
경상도의 일반적인 서민가옥은 다른 지방의 그것과 평면구성이 매우 흡사하여 一자형 평면에 부엌과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며, 방 전면에 퇴가 붙기도 하나 이것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 그림 27]의 집(경상남도 남해군)은 이 지방 서민가옥의 표준형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다만 작은방 옆에 부엌을 붙이고 이곳을 헛간으로 같이 쓰는 것이 조금 다르다.
해안이나 도서지역에서는 반농반어의 생업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구나 농기구를 넣어 둘 수장공간의 필요성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절실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이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해도를 비롯하여 욕지도 · 비진도 · 찬성도 등지의 남해안 도서지역의 가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기둥을 세운 주추를 기단 위에 바로 놓지 않고 5㎝ 내외로 짧게 자른 볏짚이나 보릿대를 진흙과 함께 버무려서 주추자리만큼 단을 쌓은(높이 20∼30㎝ 정도) 뒤에 주추를 올려 놓는 것이다.
둘째는 [그림 27]에서와 같이 굴뚝을 집 밖에 세우지 않고 모두 부엌의 부뚜막 안쪽에 시설하는 점이다. 따라서 구들을 돌아나오는 연기는 부엌벽에 설치된 살창이나 개방된 윗인방 사이로 빠져 나간다. 그리고 굴뚝의 중앙부에 턱어를 만들고 예전에는 이곳에 광솔불을 붙여서 부엌 안을 밝혔으며, 최근까지는 등잔불을 올려놓았다.
셋째는 퇴 전면의 장귀틀이 중앙의 기둥을 감싸는 형식으로 구조되는 점이다. 장귀틀 안쪽에 두 개의 촉을 내고, 이를 기둥에 뚫어놓은 구멍에 박기 때문에 자연히 바깥쪽이 기둥의 반을 감싸며 반대쪽의 귀틀도 같은 모양을 이루는 것이다.
서민가옥 중에도 안동시 일대에 분포하는 一자형 가옥 중에는 5, 6칸에 이르는 것이 적지 않다. 참고로 6칸집의 평면구성을 살펴보면, 동에서부터 각 한 칸씩의 헛간 · 외양간 · 부엌 · 안방 · 윗방 · 사랑방으로 이어지며 5칸집에는 헛간이 없다. 6칸집에 대청이 없는 점은 이 지역의 가옥이 지닌 특징의 하나이다.
[그림 28]의 집(경상북도 안동시)은 부엌이 가옥의 중앙에 배치되어 동선(動線)의 중심을 이루며 통로의 구실도 겸한다. 또 외양간이 가옥 내부에 배치되고, 평면구성이 겹집형식으로 이루어진 점도 이 가옥이 지닌 특징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그림 29]의 집(경상북도 영주시)은 중앙에 대청이 마련되고, 부엌이 안방의 전면으로 오며, 대청 전면에 봉당이 배치되는 등 [그림 28]의 가옥에 비하여 매우 다양한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의 대청은 중부지방이나 경상도의 다른 지역의 것과는 달리, 단지 바닥에 마루가 깔렸을 뿐으로 대청으로서의 기능은 매우 미약하여 상방이나 안방의 통로의 구실을 하는 정도이다. 집에 따라서는 대청에까지 흙바닥의 봉당이 연장되기도 한다.
[그림 29]와 [그림 30]의 가옥은 공간이 겹집형식으로 배치되고, 외양간이 옥내에 있으며 까치구멍이 설치되었다. 또 마루가 가옥의 중심부에 오고, 마루의 기능이 미약하거나 처음부터 설치되지 않는 점 등으로 미루어 북부지방가옥의 田자형 평면의 한 변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옥이 분포하는 태백산맥의 남단지역인 울진군 · 봉화군 · 영주시 · 안동시 등지의 가옥은 강원도의 가옥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동시에 유형에 있어서는 북부형 가옥의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그림 30]의 가옥(경상남도 창녕군)은 전면에만 기둥을 세운 담집으로 지붕의 무게를 덜기 위하여 서까래 사이를 새끼줄로 촘촘하게 엮고 새를 얹은 뒤에 짚을 덮었다.
부엌의 한쪽에 부엌방을 드린 점이 눈을 끄는데, 창녕군 영산면 일대에는 이러한 평면으로 구성된 집이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 서민가옥의 한 유형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림 31]의 가옥(경상북도 경주시)은 이 지방의 중류가옥으로 각 一자형의 안채 · 사랑채 · 곶간채의 세 건물이 모여서 ㄷ자형을 이루었다. 안채의 큰방과 머릿방 사이에 대청이 배치되고, 이들 세 칸의 전면과 대청의 후면에까지 퇴가 달리는 등 앞에서 설명한 집들과는 달리 대청이나 퇴가 중요 공간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대청의 앞뒤에 벽을 치고 두 짝 열 개의 널문을 달아 놓은 점이 눈을 끈다.
다른 지역에서는 여름철에 식구가 대청에 모여 식사를 하고 손님을 접대하고 혼례식을 거행하기도 하나, 이곳의 대청은 이와 다른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실제로 대청을 곡식가마니와 여러 가지 세간살이 그리고 제사기구 등을 보관하는 수장 공간으로 이용하며, 이 때문에 전면의 문은 개방되는 일이 거의 없다.
경상도의 중류 가옥 중에는 이와 같이 대청을 수장공간으로 쓰는 집이 적지 않은데, 영주시 일대에서는 이를 고방으로 부르기까지 하며, 안채 부엌과 사랑채 부엌 사이의 모퉁이에 마루를 깔고 이를 다른 지역의 대청처럼 이용한다.
이 집의 안채 머릿방 전면의 퇴는 누마루로 되었으며, 마루 아래에 함실 아궁이를 붙였다. 그리고 사랑채 전면의 퇴쪽에 담을 쳐서 외래객은 안마당을 통하지 않고 밖에서 직접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변소도 안변소와 바깥변소를 따로 갖추는 등 소규모의 중류 가옥임에도 우리 나라 상류 가옥에 깊은 영향을 준 유교적인 덕목을 실천하기에 큰 불편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배려를 베풀었다.
경상북도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와 의촌리, 풍천면 하회리 그리고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와 같은 유교문화의 뿌리가 깊은, 이른바 양반촌의 중상류 가옥은 평면이 ㅁ자형으로 구성된 집이 대부분이다.
특히 중류 가옥의 경우에는 [그림 32]의 가옥(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처럼 건물의 네 귀가 완전히 붙은 집이 많으며, 칸 수를 보면 안채와 사랑채가 각 4칸씩이며 좌우에 옆채가 각 3칸씩이어서 모두 12칸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같은 ㅁ자형 가옥이라고 하더라도 12칸이 넘으면 상류가옥의 범주에 넣어도 좋을 것이다.[그림 32]의 가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시어머니의 안방이 한 칸반 규모임에 비하여 며느리의 방은 한 칸인 점이다. 이 위에 안방 부엌 위에 마련된 2칸의 다락이 안방에 부속되었으므로 두 방 사이의 격차는 매우 큰 것이다.
이들 지역 중상류 가옥의 며느리방은 크기뿐만 아니라 내부의 시설에 있어서도 유별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즉 며느리방에는 장판 대신 흙바닥에 자리를 깔며 천장에도 반자를 시설하지 않고 연등천장 그대로 두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전라도의 상류가옥에 비하여 큰 대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경상도의 상류 가옥은 대체로 우아하고 화사하며 집치레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라도지방의 가옥과는 달리, 질박하고 강건하며 꾸밈을 모르는 분위기를 이룬다.
또 이 지방에서는 넓은 평지보다도 좁은 산곡간(山谷間)이나 언덕 위에 집터를 잡는 경향이 뚜렷하다. 따라서 심한 물매를 기단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하지만 가옥 내의 여러 건물은 여러 층으로 세워지게 마련이며, 좌향에 있어서도 자연적인 지세에 순응할 수밖에 없어 채광이나 급수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은 풍수설, 유교풍의 선비정신, 이른바 양반계층의 우월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며, 특히 중류가옥의 설명 중에 보기를 든 것과 같이 이 지방의 상류가옥이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도 문중 중심의 폐쇄적인 생활관습이 낳은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중상류가옥의 대부분의 평면이 ㅁ자형이나 이를 기본으로 하는 평면으로 구성된 점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황해도에 분포하는 가옥의 평면형에는 一자형 · ㄱ자형 · 二자형 · 田자형 · ㅁ자형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一자형과 ㄱ자형은 평안남도의 접경인 은율군 · 안악군 · 황주군 · 수안군 등지에 많으며, 이들은 평안도지방의 같은 평면형 가옥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북부형에 속하는 田자형 평면을 지닌 가옥은 멸악산맥 중앙부인 봉산군과 재령군 그리고 평산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경기도에 연접한 연백군 일부와 평산군 남쪽에는 앞의 ㄱ자형과는 공간의 배치가 조금 다른 ㄱ자형과 ㅁ자형 가옥이 있으며, 二자형 가옥은 재령군의 일부에 분포한다.
그런데 황해도에는 낭림산맥 남쪽 끝에서 이어지는 언진산맥이 서북쪽에 도사리고 있으며, 이의 지류라고 할 멸악산맥은 서북의 곡산군에서부터 동남의 옹진군에 이르기까지 전도에 걸쳐서 뻗어 있다.
따라서 강원도의 가옥이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북부계통의 田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삼고 있듯이, 이 지방의 가옥도 이 두 산맥이 이루는 지형적인 이유와 이에 따르는 인문적인 환경 등의 영향으로 북부형에 속하는 평면을 지닌 가옥이 적지 않은 분포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방의 ㄱ자형 평면을 지닌 가옥 중에는 마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가지가 있는 바 앞의 것은 멸악산맥의 동남쪽인 경기도 인접지역에 분포하며 뒤의 것은 평안도와 가까운 곳에 있다.
또 매우 드물지만 이 지방의 ㄷ자형 가옥에도 마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가지가 있으며, 분포지역은 앞의 ㄱ자형과 비슷하다 [그림 36].
[그림 33]과 같은 ㄱ자형 가옥은 평면형에 있어서는 평안도의 그것과 다름이 없으나 평면구성의 내용을 살펴보면 몇 가지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첫째는 부엌이 건물의 한끝에 배치되고, 딴방에는 별도의 아궁이가 설치된 점이다. 따라서 평안도 가옥의 부엌에 비하여 기능이 감소되고 면적도 줄어들었다.
둘째는 경기도 인접지역의 경우 셋째방과 딴방 사이에 마루가 설치되고, 아랫방과 윗방 전면에도 툇마루가 생겨났다. 평안도의 같은 평면형 가옥에 마루는 물론 툇마루조차 없었던 점에 비하면 이것은 매우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다.
또 마루와 셋째방 그리고 마루와 딴방 사이의 문이 모두 네 짝의 들문으로 되어 있어서 필요한 경우에는 이 세 공간을 통간으로 터놓을 수 있는 것도 큰 변화의 하나라고 하겠다.
셋째는 부엌과 아랫방 사이의 샛문이 없어진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대체로 기후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평안도에 비하여 황해도는 기온이 높고 여름도 길어서 마루가 절실하게 필요하였을 것이며, 셋째방과 마루, 그리고 딴방을 하나로 터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같은 이유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황해도의 가옥은 중부지역의 가옥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림 34]는 황해도의 서남쪽인 벽성군 일대에 분포하는 서민주택이다. 부엌이 건물의 모서리에 자리하여 이곳에서 안방과 딴방에 불을 땔 수 있도록 된 것은 평안도의 ㄱ자형 가옥과 상통하지만, 외양간이 옥내에 있으며 더구나 봉당이라는 공간이 생겨난 점은 이 지방 가옥의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봉당은 원래 흙바닥으로 되어 있으나 [그림 35]와 같이 이곳에 마루를 깔기도 하며 이 경우에도 봉당이라고 부른다.
[그림 35]의 가옥은 앞의 집에 비하여 외양간이 사랑방 앞쪽의 독립건물로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딴방이 들어섰으며, 윗방 · 아랫방이 분할되어 있다. 이와 함께 아랫방 전면에는 마루를 깐 봉당이 생겨났다.
그리고 봉당과 딴방의 전면을 툇방이라고 하여 이곳을 통로로 이용하거나 농기구 등의 여러 가지 물건을 놓아두기도 한다. 툇방 앞의 널벽은 원래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측담에는 날개(이곳에서는 띄적이라고 한다)를 둘러놓기도 한다.
이 집은 북부형의 전(田)자형 평면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정주간이 생략되고, 부엌과 아랫방 북벽에 문이 있으며, 봉당이 존재하는 점 등이 다르다.
이러한 변화는 지리적 조건, 특히 기후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지역에 따라서는 사랑방 자리에 외양간이 오기도 한다. 이러한 가옥은 멸악산맥을 중심한 신천군의 일부 산간지대와 송화군 · 온천군 · 장연군, 남쪽으로는 연백군 · 평산군 등지에 분포한다.
황해도에서는 평면이 ㅁ자형으로 구성된 집을 또아리집이라고 한다. 이 집은 부엌이 방과 방 사이의 모서리에 배치된 ㄱ자형 건물 앞에 대문이 달린 바깥채가 세워지고 안채 측면에 광 등의 부속건물이 들어서는 것이 보통이다. 또아리집에는 대체로 세 유형이 있다.
첫째는 [그림 36]과 같은 중류가옥으로 안채나 바깥채에 마루를 갖추지 못한 집이다. 이에 비하여 상류가옥이라고 할 [그림 37]의 집은 윗방 전면과 사랑방 측면에 마루가 생겨나고 마루 사이에는 마룻방이 들어섰다.
또 안방과 건넌방 전면에 퇴가 부설된 것도 눈에 뜨이는 점이다. 이러한 집은 해주를 중심한 벽성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그런데 상류의 또아리집 중에는 연안군과 개성 부근의 것은 마루가 안채 중앙에 배치되며, 사랑방이 윗방 · 아랫방으로 나뉘고, 외양간은 바깥채 전면으로 떨어져 나가며 그 자리에 또 하나의 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이곳의 또아리집은 중부형에 더 가까워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평안도에는 二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가옥이 가장 많으며, 이 밖에 一자형과 ㄱ자형이 있고, 전형적인 북부형 가옥이라고 할 수 있는 田자형이 산재하며, 드물기는 하지만 ㅁ자형의 또아리집도 보인다.
이들의 분포지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또아리집은 평안남도의 남부와 대동강 연안의 이북지역에 나타나며, 田자형은 평안북도의 낭림산맥의 북단 좌우측인 자성군 · 희창군 · 위원군 · 초산군 등지의 산간지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ㄱ자형은 평안남도 북대봉산의 서남쪽인 성천군 · 덕천군 일대에, 그리고 一자형은 평안남도의 평야지대인 대동군과 강동군 일대, 그리고 평안북도의 삭주군과 같은 북도의 서남쪽 평야지대인 선천군 · 철산군 등지에 산재한다.
[그림 38]과 같이 一자형집은 각 한 칸씩의 부엌 · 아랫방 · 윗방으로 구성된 3칸집으로, 이것은 평안도지역의 특유한 가옥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 나라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서민가옥의 표준형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다. 서민가옥은 필요불가결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므로 지역에 따른 변화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 지방을 비롯한 황해도 등지에서는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랫방과 윗방의 전면에 널벽을 치고, 이곳을 통로로 이용하는 동시에 농기구나 밭곡식이 담긴 가마니 등을 두어 수장공간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한편 널벽이 없이 개방된 경우에도 이곳을 툇방이라고 부른다. 중류 이상의 가옥에서는 아랫방과 윗방 사이가 통간으로 되는 것이 보통이며, 이때에는 두 공간을 통틀어서 안방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ㄱ자형의 가옥은 이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과 개성을 비롯한 중부지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이곳의 집은 [그림 39]에서 보는 것과 같이 부엌이 ㄱ자로 꺾이는 모퉁이에 배치되고 대부분의 가옥에 대청이 없는 점에 있어서 중부지역의 것과 대조를 이룬다. 또 대청이 있다고 하여도 안채의 중앙부가 아니라 아랫사랑방 남쪽에 부속되며 이곳을 마룻방이라고 부른다.
부엌을 건물의 꺾임 부분에 배치한 것은 양쪽방에 불을 넣는 일을 간편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운 기후조건에 매우 적합한 평면배치라고 하겠다. 이에 따라 부엌은 중부지방의 그것보다 매우 넓은 공간을 차지하게 되며, 겨울에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작업을 할 수도 있다.
또 이 지역의 가옥은 강원도지역의 ㄱ자형 가옥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강원도지역의 집은 몸채의 부엌 쪽에 외양간이 꺾여 달려서 ㄱ자형을 이루나, 이곳의 가옥에는 반드시 방이 배치되는 것이다.
또 강원도지방의 외양간은 기본적으로 지붕에 용마루를 걸지 않은 채 몸채에 이어짓는 것이 보통이며, 용마루가 있다고 하여도 몸채의 그것에 비하여 아주 작으며 지붕도 몸채 지붕보다 매우 낮다.
ㄱ자형의 가옥에서는 그림에서처럼 아랫방과 윗방 사이가 통간으로 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아들이 혼인할 때에는 칸을 나누고 아들 내외가 윗방에서 기거한다.
아랫사랑방은 바깥노인이 쓰며, 윗사랑방은 공부방으로 이용하거나 곡식이 담긴 항아리나 독 등을 두어 도장을 대신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아랫방과 윗방 사이에 칸을 질러서 따로 쓰고 있음에도 아랫방을 큰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정생활이 이 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은 이 방에서 식사를 하며 좋은 세간살이를 두는 등 방 치장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二자형 가옥은 [그림 40]에서 보는 것과 같이 안채와 바깥채가 나란히 배치된 평면형이다. 건물의 좌우끝은 담으로 이어지며 앞뒤 두 채의 칸 수는 어느 경우에나 동일하다.
이 가옥은 앞의 一자형 가옥을 기본으로 하면서 출입을 위한 대문, 가축을 기르는 외양간,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두는 헛간 등으로 구성된 부속건물이 늘어난 형태의 것으로 결국 一자형 가옥의 확대 발전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림 40]은 二자형 가옥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것으로, 안채의 맏윗방과 바깥채의 사랑방이 없는 3칸집이 많은 편이다. 맏윗방이 있는 경우에는 이 방을 혼인한 아들 내외가 사용한다. 이러한 유형의 가옥은 평안도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첫째는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그 이북지대에서는 지붕이 보통 뱃집의 형태를 이루나 이남지역에는 우진각형이 많다.
둘째는 대동강 이북의 가옥에는 안채의 뒷벽에 문이 없는 것이 원칙이나 이남의 가옥에는 뒷벽에도 문을 설치한다.
셋째는 대동강 이남의 가옥에는 부엌과 아랫방 사이의 샛문이 안뜰(안마당을 이곳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 이북지대에서는 그 문이 뒷벽 쪽으로 올라가 붙는 경향을 보이는 점이다.
이 차이점들은 대체로 기후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특히 대동강 이북의 가옥에서 뒷문을 달지 않은 것은 겨울철에 강하게 불어오는 서북풍을 최소한도로 막아보려는 배려에 의한 결과라고 하겠다.
평안도의 또아리집은 [그림 41]과 같이 二자형 가옥의 좌우 양쪽에 사랑채와 헛간채가 들어서서 이룩되거나 ㄱ자와 ㄴ자형의 건물이 마주 세워져서 ㅁ자형을 이루는 가옥으로 규모를 보아서 이 지방의 상류가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 이곳의 또아리집은 건물의 네 귀나 두 모퉁이가 반드시 터져 있으며, 황해도의 또아리집과 이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하겠다.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또아리집의 경우 안채와 바깥채의 평면구성은 二자집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사랑채는 부엌과 위 · 아랫사랑방으로 구성되고, 헛간채는 두 칸의 헛간과 그 사이에 작은 문으로 이루어진다.
이 문은 주로 여성이 이용하며 농기구나 땔나무 등을 가지고 드나들기에 편리하도록 세운 것이며, 대문채 중앙의 문이 가옥의 대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네 건물은 울담장으로 이어져서 집안팎의 경계가 된다.
ㄱ자와 ㄴ자로 구성되는 또 하나의 또아리집은 [그림 39]의 ㄱ자형 건물을 기본으로 하면서 전면에 대문과 외양간이 배치되고 측면에 헛청과 곡간 등이 있는 부속건물이 달리는 것이 보통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안도의 가옥은 一자형과 이것이 확대 발전된 二자형 가옥이 기본을 이루며, 이들의 변형이라고 할 ㄱ자형과 ㅁ자형이 산재하고, 이 밖에 함경도에 인접한 산간지대에 田자형 가옥이 분포한다고 하겠다.
이 지방 가옥이 지닌 평면구성의 특징을 들어보면 [그림 42]에서 보는 것과 같이, 첫째 집 중앙부에 정주간이라는 생활공간을 두고, 둘째 이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田자와 日자가 되도록 방을 두 줄로 배치한 점이다. 이러한 유형의 가옥을 두줄박이집 · 양통형집 · 전자집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방을 이처럼 두 줄로 배치하는 것은 벽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열의 손실을 막아 보온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이며, 이 지방 가옥이 북부형이라고 호칭되기도 하는 것은 이에 연유한다.
한편 외양간과 방앗간을 몸채 안에 둔 집을 강원도의 일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전형을 이루고 있는 곳은 이 지방뿐이므로 이를 특징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주간은 통간이며 마당과 정주간 사이에는 벽이 없이 터져 있어 한 공간을 이룬다. 이렇게 정주간이라는 독특한 살림방이 있고, 이것과 마당이 하나의 큰 공간을 이루는 것은 이 지방 특유의 평면구성법이다. 이와같은 함경도 특유의 전형적인 가옥은 평안북도의 낭림산맥 북서쪽인 만포 · 자성 · 중강진 · 후창 등지에도 분포한다.
한편 함경남도의 동남쪽인 함흥 · 영흥 · 고원 · 원산 · 안변 같은 곳에는 정주간이 생략된 평면의 가옥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형식의 가옥은 일종의 변형으로 강원도 북부의 가옥과 일맥상통한다.
[그림 42]의 가옥을 보면 정주간을 중심으로 하여 전면에 각각 퇴를 갖춘 샛방과 윗방이 배치되고, 그 윗면에 안방과 고방이 있다. 그리고 정주간 맞은쪽 전면에 외양간이 들어서고 뒤쪽에 디딜방앗간을 두었다.
그런데 정주간 좌우의 방과 마당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으며, [그림 42]와는 반대로 방이 동쪽에 배치될 수도 있으며, 다만 집터 주위의 지형을 보아서 높은 쪽에 방을 둔다.
이렇게 해야만 마당에서 때는 불길이 정주간을 거쳐 각 방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 집의 좌향은 남향이나 동남향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마당보다 50㎝ 가량 높은 정주간은 온돌로 되었으며, 바닥에는 보통 장판을 깐다.
이 공간은 한 가옥 내에서 이용률이 가장 높은 공간으로 주로 나이 많은 부인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거처하나 가족 전체가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여기서는 여성들이 주로 거처하였으며, 성년남자들은 숙식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함경북도의 북부지방에서는 정주간을 샛방 · 안방 · 윗방 · 고방 등 네 개의 방을 합한 것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크기로 만들고, 남녀 가족이 모두 이곳에서 숙식을 하기도 한다. 또 마을사람들은 물론이고 외지의 손님도 정주간에서 접대한다.
정주간의 마당 쪽 끝에는 부뚜막을 설치하고 큰 가마솥 한 쌍이나 크고 작은 솥 두 개를 걸어두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작은 솥 두 개를 앞뒤로 걸기도 하며 이때에는 정주간의 이 부분이 앞으로 약간 돌출한다.
한편 취사작업은 부엌과 정주간이 한 공간을 이루고 있어 자연히 정주간에서 하게 되며, 불을 실내에서 피우므로 그만큼 보온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샛방은 4개의 방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방이다. 값진 세간살이와 장롱을 모두 이 방에 들여놓으며, 농다리 · 시렁 · 횃대 등도 설치한다.
다른 지역의 안방은 ‘안쪽에 있는 방’이라는 의미 외에 ‘큰방’ 또는 ‘중심이 되는 방’이라는 뜻이 숨어 있으나, 이곳의 안방은 단지 ‘안쪽방’이라는 내용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방은 다른 지역의 안방 뒤에 있는 골방에 가까우며 정주간이 안방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고방에는 장독이나 곡식이 든 독 · 항아리 등을 둔다. 가옥에서는 제일 구석진 곳에 있어 햇볕이 들지 않는다. 집에 따라서는 윗방과 고방 사이에 사당방(祠堂房)을 따로 두기도 하며, 어떤 집에서는 고방을 사당방으로 대용한다. 그러나 상류가옥에서는 사당을 별채로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외양간 전면에는 나무구유를 걸고 그 밑에는 흙을 바른다. 가축을 이처럼 집안에서 기르는 것은 혹독한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첫째 목적 외에 가장 귀중한 재산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외양간 천장과 지붕 사이의 빈 공간에는 농기구 · 빈가마니 · 자리 등을 얹어둔다.
이와 같이 서민가옥은 8칸집이나 그보다 규모가 작은 6칸집도 있으며 4칸으로 축소되기도 한다. 6칸집은 윗방과 고방이 없는 것이 통례이고, 4칸집은 이에서 방앗간과 외양간마저 없어진다. 이 지방에는 이보다 더 작은 규모의 가옥이 거의 없지만 만일 있다면 그때에는 외통집으로 변하여 3칸이나 4칸집이 된다.
한편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8칸집의 서쪽에 두 개의 방을 더 붙여서 10칸집을 세우기도 하나, 온돌의 불길이 이 방들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므로 이 방은 고방으로 이용할 뿐이다.
중류가옥은 몸채는 서민가옥과 같고 다만 사랑채나 헛간채 등의 부속건물이 더 있을 뿐이다. 함경북도 북부지방의 상류가옥에서는 몸채를 중심으로 하고 뒷사랑 · 앞사랑 · 옆사랑(모캐사랑)을 짓기도 하나 보통은 뒷사랑이나 옆사랑만을 짓는다.
뒷사랑은 온돌을 놓지 않으며 간벽을 세우지 않고 통간으로 해서 곡식창고로 쓰며 농기구 같은 것도 넣어둔다. 옆사랑은 몸채와 ㄱ자형이 되게 지으며 반은 온돌방으로 나머지는 창고로 쓴다. 앞사랑은 대문간을 중심으로 하고 서쪽(몸채의 샛방 쪽)에는 온돌방을, 반대쪽에는 헛간을 둔다.
이러한 사랑채가 없는 집에서는 마당 앞에 헛간을 세우기도 하는데, 이를 귀틀집식으로 짓는 일도 있다. 또한 이 지방에서는 [그림 43]의 가옥에서와 같이 몸채는 두줄박이집으로 세우나 부속건물은 외줄로 하는 것이 통례이다.
제주도 주택은 내부와 외부공간을 구성하는 방법면에서 크게는 육지의 남해안 민가와 맥이 닿아 있지만, 형태나 공간구성, 특히 집의 구조에 있어서 다른 지방의 주택과는 다르다.
특징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제주도 주택의 외부공간을 보면, 그것은 하나의 음악과 같이 도입부 · 전곡부 · 발전부 · 종결부로 되어 있다. ‘올레’는 도입부로 육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며 ‘올레목’은 전곡부에 해당한다.
마당은 발전부이고 일조 · 일사 · 채광 · 통풍 · 조망을 위한 양의 공간이다. 종결부는 주택의 내부공간과 뒤안 · 텃밭 ‘우영’ 등으로 이루어졌다.
뒤안은 마당과 반대되는 음의 공간으로 통풍과 휴식 · 사색을 하는 곳인데, 이곳은 육지와는 달라서 외부로부터 완전히 폐쇄된 뒤뜰의 성격을 가진다. 살림채들의 배치방법은 一자모양의 집을 ㄱ자 · 二자로 구성하기 시작해서 ㅁ자를 이루는 방식을 취하여 육지의 남부지방과 유사하다.
내부공간은 사회적 공간인 대청을 중심으로 완충공간인 툇마루를 거쳐서 마당과 연결되며, 한편으로 사적 공간인 구들과 뒤안이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 보건위생공간인 찬방과 부엌으로 연결된다.
살림채의 평면은 분할방식에 의해서 구성되는데 크게 분류한다면 남부지방과 맥이 닿는 겹집형태이다. 공간분화가 육지에 비하여 현저하여 고방과 찬방이 안채에 딸려 있다.
밥짓기와 난방용 연료가 분리되어서 합리적 평면구성이 가능하였으며, ‘굴묵’이라는 공간이 생겼고, 부뚜막이 방과 전혀 반대방향으로 평지에 설치되었다. 장독대에 놓여진 독의 숫자가 적으며 헛간은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사랑방이 없는 반면에 한 집에서 부자간에 따로 살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귀족과 서민계층 간에 주택형태가 별로 다름이 없고 크기만 다를 뿐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물매가 낮으며 새로 이었는데, 굵은 동아줄을 격자로 묶어서 바람에 날리지 않게 하였다. 집의 바깥벽은 창문 등의 개구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짙은 회색의 다공질 현무암으로 쌓았다.
이것은 제주도에 대단히 많은 것으로서 울타리뿐만이 아니고 밭 등의 모든 경계선에는 이것으로 둘러쳤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집의 모양은 유선형의 지붕과 무거운 돌로 쌓은 벽체가 대비를 이루어서 경쾌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대지는 선정과 집의 방위는 ‘정시’라고 불리는 지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이곳 제주도는 지관에 의하여 집의 방위를 잡는 경향이 아직도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비바람이 세기 때문에 지붕을 낮게 하고, 물매를 유선형으로 하였으며, 바깥벽을 돌로 쌓고, 외부 창문은 모두 만장문으로 하였으며, ‘들풍채’ · ‘알풍채’ 등의 시설을 하기도 하였다. 안채와 바깥채와의 거리는 일조에 의한 인동간격(隣棟間隔)이 고려되었다.
집의 방위는 정남보다는 동남간이 많아서 영구 일영(日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채광은 방문이 열려진 상태에서 충분하도록 되었고, 방의 치수는 기본 척 수가 7자로서 사람 몸의 크기와 맞도록 고려되었다.
또한 이것은 실내온도를 유지하기 좋은 최소의 크기이다. 온돌의 연료는 말똥을 사용하였고 굴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온돌구조는 구들돌을 얹는 육지식이 아니고 둥근 냇돌들을 마구 쌓아놓은 옛날 구들방식이다.
또한 이곳은 대부분이 암반층이었으므로 주초를 세울 때 정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집의 마룻바닥 높이는 육지보다 매우 낮게 처리되며 벽체는 대체로 성벽구조이다. 대청의 바닥은 마루로서 모두 우물마루이다.
가구 방법은 3칸 7량 전후좌우퇴방식으로 격식을 갖춘 방식을 쓰고 있다. 구조기술을 보더라도 내민보구조와 삼각형 결구법을 많이 응용하여 연약한 부재를 사용한 집들이 상당한 무게의 하중을 견디고 있음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