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께수리는 단층장 형태의 금고로서, 귀중품이나 문서를 보관하며 약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상업 도시인 개성에서 발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경종 2년 4월 20,甲戌) 조흡(趙洽)의 공초 기사에 조흡의 부친인 조이중(趙爾重)이 통제사로 재직 중이던 숙종(肅宗) 37년(1711)에 각기소리(角其所里) 8개를 만들고 그 안에 기화(奇貨)를 넣어 진신(搢紳: 벼슬아치)에게 보낸 일로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711년에 이미 가께수리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선비들은 검은 쇠로 장식한 것을 선호하였으며, 그 내용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나오는 “반드시 일좌(一坐; 일정한 위치)에 비치한다”는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께수리는 일본의 현연(懸硯; がけすずり)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연은 밑에는 종이를, 위에는 벼루를 넣은 두 개의 상자를 포개 놓는 문방가구의 명칭으로 15∼16세기에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오사카[大阪]의 사께이[堺]항구에서 사용하다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다도용(茶道用) 단스[簞笥]와 상선용(商船用) 금고인 가께수리의 두 가지 양식으로 발전되었고, 16∼17세기에 상업이 발달되면서 중인(中人)계층에서 폭넓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명대의 리유(李漁, 1611∼1680)의 『입옹우집(笠翁偶集)』「주궤(櫥櫃)」에는 의사, 귀족, 학자들이 약재를 보관하고 귀금속이나 저술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분류 보관하는데 활용한 가구로, 한 층을 나누어 여러 층으로 만들고 한 칸을 나누어 여러 칸으로 만든 백안주(百眼廚)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이 백안주라는 명칭은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에 의해 천안주(天眼廚)로 변하였다. 헌종 연간에 기록된 저자미상의 『재물보(才物譜)』에는 「頂櫃(정궤):天眼廚粧嵌 仝譯(각비슈리 천안주장감 동역)」이라 하여 중국식 명칭도 통용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가께수리, 정궤, 천안주 등으로 부르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가께수리로 정착되었다.
앞면에 두 개의 여닫이문을 달고, 그 안에 여러 개의 서랍을 달아 귀중품을 분류하여 보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목(紋木)이나 화장재로도 귀하게 여기는 용목(龍目)으로 사개를 물려 백골을 만들고 여러 개의 경첩을 전면(前面)에 달고 잠금장치를 하였고, 네 귀는 고깔싸개로 감싸서 견고하게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