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등에는 초롱·등롱·조족등(照足燈)이 있다. 들 수도 있고, 걸어 둘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의식과 예식, 밤길에 길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철사·놋쇠·대나무·나무·종이로 골격을 만들고 표면에 종이나 깁[紗]을 바르거나 구슬로 엮었으며, 판유리가 수입된 이후에는 유리를 끼우기도 하였다.
제등은 위쪽에 손잡이 자루를 달아 들고 다니기에 편하며, 이 자루에 비상용 초를 넣을 수 있게 만든 것도 있다. 내부에 초를 넣으면 초롱이라 하고 등잔을 넣으면 등롱이라 하였고, 깁을 표면에 씌운 것은 그 깁의 색에 의해 명칭을 붙였다. 신분에 따라 깁의 색과 사용 숫자에 제한을 두기도 하였다.
제등은 왕실의 의례나 행차의 필수품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 9월 6(庚申)일에 의장제도 길장(吉葬)에 사용하는 등촉은 “백초롱 2, 청초롱2, 홍초롱 2, 망촉 500, 화철롱(火鐵籠) 40. 거화(炬火) 500”이라는 기록을 통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11년 8월 12(戊寅)일에 “어전의 영기와 초롱은 모두 홍색을 사용하고 세자궁은 청색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옛날 제도에서는 어전과 군문에서는 모두 청색을 사용하였는데 이삼(李森)이 일찍이 '홍색을 사용하여 구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하여 영조 11년에 어전 초롱의 색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조 22년에 발간된 『속대전(續大典)』 「군기(軍器)」에 따르면 "어련(御輦) 앞에는 홍색바탕에 청색으로 아래위에 간을 두른 초롱을, 소레의 좌우에는 홍색의 초롱을 배치하였고 왕세자의 수레 앞에는 검은색 바탕에 홍색으로 위아래 단을 한 초롱을 두고 수레의 좌우에는 청색바탕에 위아래에 홍색단을 두른 초롱을, 좌우에는 청색의 초롱을 배치한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 몰락 이후 대한제국 시대에는 내부에 등잔을 넣은 등롱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석유가 수입되어 초보다 등잔의 밝기가 밝았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황제와 황후는 황색의 등롱을, 황태자와 1품은 홍색을, 3품은 청색에 홍색의 단을 댄 등롱을, 그 이하는 홍색에 청단을 두른 등롱을 사용하였다.
왕실뿐만 아니라, 신분에 따라 초롱의 사용을 규제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왕조실록』 숙종 39년 5월 8(甲寅)일에 “지경연(知經筵) 조태채(趙泰采)가 진달하기를 ”'서인의 장례에 대나무 초롱을 쓰니 지금부터 범한 자는 논죄하소서'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는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서민들은 홍색에 청색의 긴 단을 두른 청사초롱을 혼례 시에 사용하였는데, 현재도 청사초롱은 결혼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