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이찬(伊飡)이었다. 880년(헌강왕 6) 2월 예겸(乂謙)의 후임으로 시중에 임명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해 9월 시중(侍中) 헌강왕이 민공 등의 근신(近臣)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민가가 즐비하게 늘어섰고 집집마다 가락이 끊이지 않음을 보고, 서울의 민가가 모두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 대신 숯으로 밥을 지을 정도로 융성하게 된 것은 모두 민공 등이 잘 보좌한 때문이라고 치하하였다고 한다. 헌강왕 때는 신라 하대의 정치적 불안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에 40여 금입택(金入宅)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중이었던 민공이 헌강왕을 잘 보필한 데도 어느 정도 기인한 듯하다. 특히, 민공은 6년 6개월 동안 시중직을 역임함으로써 신라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시중직에 있었던 인물이다.